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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상담 묵상

주님이 당신을 향해 침묵하고 계실때

by GOTOKINGDOM 2026. 1. 2.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 91:11)
 
오늘은 신앙상담 질문 1-2에 이어 3-4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1-2를 보지 못하신 분들 위해 아래 링크를 달아 놓습니다 
https://idea5936.tistory.com/entry/바알에게-무릎-꿇지-않은-7천인을-찾습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인을 찾습니다

오늘은 신앙 상담 안에서 그와 한 마음으로 성령님의 답변을 들으며 함께 나누었던 대화에서 상담자들과 나또한 같은 질문 아래 있는 것에 신기해 하며상담의 내용 일부를 동의 아래 함께 나누

gotokingdom.com

 
질문의 3-4는 이렇습니다
세 번째 질문은 교회 공동체가 말씀의 한 부분으로 치우친다
네 번째 질문은 받은 사명을 순종하기에 나는 너무 부족하다
 
먼저 오늘 상담 나눔 중에 나왔던 시편 91에서 모두에게 분명히 하고 싶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시편 91: 11에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의 히브리어의 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사자들 מַלְאָכָיו (말라카브) = 사전형은 מַלְאָךְ (말라크)
뜻은 보내진 자, 사자, 전달자, 메신저입니다.
하나님이 그 소유된 자에게 돕는 천사를 보내 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말라크는 본질적으로 “종류”, "존재"에 집중이 아니라
“기능”, "임무"를 중점으로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성경 문맥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 영적 존재인 하늘의 천사
때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인간 사자를 모두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91: 11에서는 문맥상 "인가 사자"가 아닌 “천사”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에게 명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여기서 결정적인 단서들이 있습니다.
사자들이 직접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지킴"인간 사역자의 설교나 양육으로 모든 길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보이는 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모든 길 즉, 전면적 보호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신약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인용된 말씀입니다.
그때 예수님과 사탄 모두 이 사자들을 인간 사도나 사역자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전제 자체가 하늘의 천사적 보호였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보면 사도 바울도 말아크라는 단어의 개념 안에 포함될 수 있고
요한계시록에서 교회의 “사자”는 인간 지도자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적용의 확장된 부분이지 시편 91: 11의 의미는 아닙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성경적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명령받아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보호하는 천사들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전달하는 모든 보내심 받은 인간 사자들
그러나 그 보냄 받은 자가 아닌 보내신 자에게 집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보냄 받은 사역자에게 의존하라는 시편이 아닙니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밤의 위험 속에서도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그 안에서 하나님이 직접 책임지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11절은 교회 공동체를 붙드시는 약속이기 전에
언약 백성 각각 한 사람을 향한 하늘의 명령 체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두 질문에 답을 나누기 전에 이 말씀을 꼭 드리면서 함께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 질문자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믿음으로 화합하기 위해 한 마음 되기를 원하는데
설교자나 사역자의 가르침이 너무 한 방향으로만 치우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는 그 가르침에 한 마음으로 따르는데
나는 그 가르침에 한 마음이 되지 않으니 내가 교만한 건가요?입니다
 
이는 교회 자도자의 영성 부족함이 아니라 사명 부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의 계시가 7 교회에 전해지는 것을 봅니다
모든 교회가 같은 사명이었다면 각 교회마다 달리 편지를 보낼 것이 아니라
한 편지를 동일하게 보내시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각 교회마다 편지를 주셨습니다
이는 사명이 다르며 그에 따른 원수의 방해도 다르며 교회의 나타나는 반응도 다를 것입니다
 
쉽게 말해 7 교회에 각 교회마다 칭찬하신 부분과 책망하신 부분들이 있지만
교회에 모든 것을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각 교회마다 가장 잘 알고 계신 주님이 문제점을 드러내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징계하심이 목적이 아니라 무언가를 더 주시려고 하십니다.
징계가 목적이셨다면 죄를 드러 내지도 않으실 테니까요.
 
그래서 이 나눔 중에 주신 말씀이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음인데 많은 말씀 중에
이 성경 맥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 18:18-20)
 
이 말씀은 왕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만약 당신이 교회에 가르침이 한 방향으로 치우친다 생각이 된다면 
이 말씀 앞에서 당신의 위치를 다시 점검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먼저 왕위에 오른 자는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율법서를 등사하라 하십니다
등사는 같이 기록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제사장 앞에 보관되었다는 말은 오늘날 설교자의 말씀이 나오는 근원을 말합니다
그것이 대부분 성경이겠지요 
 
그러나 설교자가 성경을 인용하지만 말씀이 나오는 근원은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설교자를 판단이나 분별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설교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배우느냐 문제입니다.
교회에 전해지는 말씀이 한 방향으로 치우친다 해도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배워지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면 당신이 형제 위에 교만한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대부분 설교자의 말씀이 한 방향으로 치우쳤다는 것은 자신이 받은 교회의 사명이 분명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의로 그 길이 옳다 함을 증명하려 애쓰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각 개인이 성령 안에서 동행하는 자들에겐 항상 걸림이 됩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가 당신과 다른 길을 가야 한다면 성령님이 반드시 그 길을 보이십니다.
아직 아무것도 판단하지 마시고 당신 스스로 분별하지도 마십시오
주님이 침묵하심은 모두 이유가 있으신 것입니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주님 보여주실 때까지 잠시 멈춰 서 있는 것도 지혜입니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갈 때 혼자 멈춰 서 있는 내가 과연 정상인가”
 
조급하게 결단하는 것보다 잠시 멈춰 있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
다수와 일치함은 언제나 안전해 보이지만, 성경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길은 좁고, 찾는 자가 적다.”
어느 쪽이 넓은 길인지 어느쪽이 좁은 길인지 분별되지 않을 때
다수가 간다고 하여 따르면 반드시 한쪽은 넓은 길입니다.
여기서 기억하셔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그 공동체 안에서 “십자가 은혜만 붙드는 사람”으로 보인다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연약하고 미련한 자리가 아니라, 가장 안전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이기는 것은 내가 어떻게 싸운 기록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와 자기 증언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12: 11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기었으니.”
오직 피는 어린 양의 피입니다.
우리의 피 흘림이 그 승리에 조금도 보템을 주지 않습니다.
구약에 모든 피는 부정함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순교자들도 예수의 피로 사셨기 때문에 그 피는 어린양의 피의 공로에 참예된 것입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인데 나만 이상한 것 같은 느낌”에 있다면
성경에서 이것은 미혹의 전형적인 표지이지, 진리의 표지는 아닙니다.
아합 시대에 선지자는 400명이 한 마음이었지만 참 선지자는 미가야 혼자였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평강 하다” 외치는 자들은 많았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싸워 지켜야 한다"는 지도자들은 한 목소리였지만
성전이 무너질 것을 말하는 예레미야는 미혹된 자, 싸우지 않는 자로 불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경을 인용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더 높은 차원, 더 강한 영적 수준으로 올라감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숫자로 증거 하지 않으셨고 육신의 평강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미가야는 뺨을 맞았고 예레미야는 깊은 웅덩이에 갇혔습니다.
지금 설교를 듣고 당신이 표적이 되고 분리를 당한다면 그 설교는 
이 시대의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은 특별히 선택받은 자들처럼 말하지만” 성경에서 ‘선택받았다는 의식’이
공동체의 정체성이 되는 순간, 거의 예외 없이 타락의 길로 인용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을 가리키시며 보이신 길은 그들의 문제가 율법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우리는 안다”, “우리는 본다”, “우리는 구별되었다”는 의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선택됨은 언제나 겸손을 낳아야 합니다.
선택됨이 겸손이 아니라 공동체의 우월감과 배제를 선동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이제 당신이 가장 아픈 지점,
“왜 성령님이 나를 증거 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성령은 언제나 소리로 증거 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는 불로 응답을 받았지만, 가장 중요한 분별의 순간에는
강한 바람도, 지진도, 불도 아닌 “세미한 소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세미한 소리는 엘리야를 즉시 문제 해결로 이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엘리야를 더 깊은 고독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성령의 침묵은 죄로 인한 부재의 증거가 아니라
당신을 보호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공개적으로 당신 편을 들어 “증거”하신다면,
마귀의 공격으로 상황은 더 격렬한 전쟁으로 번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교회 지도자와 형제들과의 싸움으로 당신의 영혼을 더 소진시킬 것입니다.
성령은 당신을 때로는 변호하지 않지만 사자들을 통하여 당신을 지키십니다.
 
당신이 말하기를 “그럼 내가 미혹된 건 아닐까, 내가 교만한 걸까”라는 반문에도
이 질문 자체가 당신이 교만에 사로잡힌 상태가 아니라는 가장 진실한 증거입니다.
성경에서 미혹된 자들의 공통점은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항상 남을 의심하며 탔을 합니다.
“혹시 내가 틀렸을까”라고 점검하는 영혼은 이미 성령의 빛 아래 서 있는 영혼입니다.
 
 
네 번째 질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각자 받은 사명이 분명할 때에 그 사명으로 인해 교회 공동체에 
분란을 일으킨다면 드러나는 모습으로는 나에게 핍박이 올 것이 뻔한데 
나는 너무 부족하여 감당할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함께 있으니 그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나에게 고통이 되고 심령이 상하여 결국 교회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기 싫어 나 혼자 살고자 내 십자가를 외면하고 떠난 건지 두렵습니다.

 
먼저 당신은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주님 품에 안겨야 할 사람입니다.
주님 품에서 그 마음에 귀를 기울여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보세요
당신은 그 무리 안에 함께 있으며 느꼈던 안타까움과 고통은 위선이 아닙니다.
이중적인 믿음도 아니며 당신은 양심의 고통을 겪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성전에서 그들과 함께 있었고,
에스겔은 포로 끌려가 우상에게 예배드렸던 백성들 가운데 함께 있었고,
다니엘은 어릴 때부터 예루살렘을 파괴한 적의 나라 바벨론 궁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들의 영에는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즉시 그 자리에서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의 영에 동화되도록 허락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지금 당신은 바로 그 경계에 서 있습니다.
교회를 떠난 지금도 당신은 그들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주시는 답은 주님이 먼저 당신을 부르십니다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주께서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서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 같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5:18-20)
 
예레미야는 늘 하나님 편에 서 있었습니다.
말씀 때문에 조롱을 받고, 외로워지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돌아오면"이라 말씀하신 것은 
우상 숭배, 불순종, 타락, 변절 같은 행위의 회개가 아닙니다.
 
문제는 관계적 흔들림으로 오는 고통 속에서 생긴 마음의 방향입니다.
18절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게 거짓된 시내 같으시다”
이 말은 신앙을 버리겠다는 원망이 아니라 상처 입은 종의 연약한 흔들림입니다.
히브리어 “타슈브(תָּשׁוּב)”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로도 쓰이지만
길을 바꾸다, 방향을 다시 잡다, 제자리로 돌아오다는
넓은 의미를 가지며 마음의 중심, 위치의 회복을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사명을 버린 것도 하나님을 떠난 것도 아니었지만
마음이 사람들 쪽으로 기울어지는 흔들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가, 사람들이 말씀 앞으로 돌아와야지
말씀이 사람들의 상처, 연약함과 타협하거나 여론에 맞추어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매우 날카롭게 적용이 됩니다.
미혹의 시대, 혼합의 시대에도 여호와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예례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귀한 것” יָקָר(야카르) 는 값비싼 것, 무게가 있는 것, 존귀한 것을 뜻합니다.
단순히 좋은 것이 아니라 쉽게 얻을 수 없는 것, 하나님께 속한 가치를 지닌 것을 말하는데
금속 중에서도 정련된 금처럼 불순물이 제거된 상태를 내포합니다.
성경에서 야카르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 생명, 언약, 보배로운 존재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즉 인간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귀한 것입니다.
“천한 것” זוֹלֵל(졸렐) 은 가볍게 여기다, 흘려버리다, 값없이 소비하다 에서 나옵니다.
잠언에서는 방탕한 자, 절제 없는 자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며 본래 의미는 도덕적 악 이전에 
가치가 떨어진 상태, “악”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긴 하나 사람의 욕구와 타협하여
힘과 권위를 잃어버린 상태, 혼합되고 희석되어 본래 목적을 잃은 것을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 심판의 말씀을 듣기 원하지 않으면서도 평안의 말,
위로의 말로 자신들을 정당화해 주는 말은 원했습니다.
선지자가 유혹받는 지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해야 하는 선지자의 입을 하나님은 "내 입"이라고 하십니다.
관계적 흔들림은 하나님의 날카로운 심판의 검을 조금 무디게 전하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어 명령의 말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 귀한 것이 천한 것과 섞입니다.
하나님은 귀한 것만 말하라는 뜻이 아니라,
혼합된 상태에서 정결한 말씀만을 분별하여 선포하라는 의미입니다.
귀한 것과 천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예레미야처럼 관계적 흔들림으로 아직도 교회를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이 혼란은 신앙이 무너짐도 사명을 버림도 아니라
신앙이 더 이상 집단의 언어로 유지되지 않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이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지 않고 십자가를 외면한 것 같아 두렵다 하셨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당신의 질문에 점검하실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예한다는 것"은 참고 견디며 버티는 것으로 참예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고통은 아무도 당신을 이해하지 않을 때 참고 견딘 고통이 아니라,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자리에 홀로 서신 고통입니다.
당신이 지금 겪는 고통이 사람들을 대신해 서 있는 고통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고난을 닮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리를 침범한 고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고통의 간구를 올려드렸지만
제자들을 강제로 참예하도록 깨우시지 않으셨습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는데 외면한 것 같아 두렵다" 하셨습니까?
당신이 놓지 못하고 있는 교회 관계가 당신을 십자가 아래로 이끄는 곳이었는지
아니면 당신을 십자가에 대신 올려놓은 곳이었는지 깊이 생각해 보세요
만약 그 자리가 당신을 의롭게 만들고, 연약한 자들의 버팀목으로 만들고,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한 대신 헌신하게 만든다면 그곳은 대리속죄의 자리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 자리에 서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그들에게 설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떠난다는 것이 외면이나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또 끝까지 남는다는 것이 순종도 아닙니다.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문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은 머물러서 생기는 고난이 있고 또 떠나는 고난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고난은 우르를 떠나는 것이었고,
모세에게도 고난은 왕궁을 떠나는 것이었고,
예레미야에게도 고난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었지
공동체를 붙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떠난 당신이 패배자가 아니듯이 남아 있다 해도 당신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어느 쪽이든 당신의 의로움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은 판단, 정죄, 죄책감을 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쉬어도 됩니다.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어떤 상황이든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아무 결정도 하지 않은 채 주님 앞에 이렇게 기도해도 됩니다.
이 기도는 미혹된 자의 기도가 아니라
끝까지 진리를 붙드는 자의 기도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시91:2-3)

Mimojang 님이 보낸 핀을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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