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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단편 묵상

예수님이 찢어 놓으신 제자들(베드로와 바울)

by GOTOKINGDOM 2025.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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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7–8
오히려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은 것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 ἀκροβυστίας (아크로뷔스티아스) = 무할례자, 곧 이방인
  • περιτομῆς (페리토메스) = 할례자, 곧 유대인

베드로는 할례자(유대인)를 위한 사도로, 바울은 무할례자(이방인)를 위한 사도로 세우셨다.

  • 베드로 - 유대인 중심 사도 직분
  • 바울 - 이방인 중심 사도 직분

하나님은 왜 이들을 따로 세우신 것일까?

베드로의 성향과 바울의 성향은 너무 닮았다

함께 동역하였다면 어쩜 우리가 보고 있는 이스라엘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 두려움이 없이 나서기를 좋아하며 주위 시선이 어떻든 자신이 옳다 생각하는 일에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실행을 해버리는 행동 대장 같은 존재였다

그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뒤에 사뭇 좀 변해 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베드로가 외식하는 모습에 자신보다 훨씬 나이도 제자됨에도 선배인 사도를 나무라는 일에

막힘이 없는 대쪽 같은 존재였다

 

또한 베드로는 3년반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오른팔임을 부인할 자 없는 유명한 자였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뿐 아니라 로마에서도 인정받는 가말리엘 학파에 바리새인이며

로마 시민권자 였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다는 것과 바울이 스데반의 죽음이 

합당하다는 증인 된것이 둘 다 죄인 중에 괴수의 수준인 자들이다 

이 둘이 동역하여 교회를 세웠다면 아마도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자신들의 종교성을 충실히 하는 율법 주의자들인 유대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더라면

곧 철저한 율법 주의자였던 바리새인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후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떻게 성령이 임하셨으며 어떻게 많은 이적을 행하였는지 유대인들에게 간증이 될 것이며

오신 메시아를 우리가 알지 못하여 십자가에 죽였다는 것을 전하면 더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의 지식과 지혜에 굴복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3년 반 동고동락하며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하늘로 오르심을

직접 듣고 보고한 증인으로 이방인들에게 증거 하였다면 훨씬 빨리 땅끝까지 복음 전파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것이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다

하나님의 깊으신 지혜는 사람이 과히 가늠할 수도 없고 가늠하게 된다 해도 이변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하심은 욥기를 통하여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가 이해하라 주신 것이 아니요 믿으라고 주신 것이다

이해되지 않고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일이라도 하나님이 그렇다 하셨으니 믿는 것이다 

그 어떤 누구와도 비교가 되지 않으시는 믿을 수 있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섭리에 굴복하지 않는 근본 죄성을 가지고 있다

믿는 자 안에서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평안하게 주님의 뜻을 구하지 못한다

내 힘으로 그것을 해결하려 분주한 마음에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어진다

할 만큼 다 하다가 그제야 겨우 하나님께 엎드리지만 그마저도 주님의 뜻을 구함보다

"해결해 주세요"가 먼저 나온다 

의로운 욥이 고난가운데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삶 모든 것을 저주하기에 이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곧 "나는 의롭다"하는 것이다

그렇다 욥은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에게 뜻이 있으셨고 마귀의 흔듦을 허락하셨다 

 

인간은 전적인 창조주의 섭리에 굴복해야 한다

욥뿐 아니라 그의 아내와 3 친구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신것 같다

모두 죽이지 않으시고 후일에 행하신 일들을 보면 욥 뿐 아니라 그의 아내와

3친구 모두에게 가르침이 이루어 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욥이요 그의 아내요 3 친구들의 모든 모습 안에 나 자신이 닮 겨져 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삶가운데 오는 고난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는 아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신명기 22: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 하여 갈지 말며.

  • לֹא־תַחֲרֹשׁ (로 타하로쉬) = 너는 갈지 말라
  • בְּשׁוֹר וּבַחֲמֹר (브쇼르 우바하모르) = 소와 나귀로 함께

 

소와 나귀를 함께 멍에 메워 밭 갈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단순히 농사법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질과 본질이 다른 것을 억지로 함께 묶지 말라”

영적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 말씀을 연결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후 6:14)고 권면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를 말하는 것만 아니라 믿는자 안에서 

역사하는 불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동체 안에 있고 또 내 안에 있다

몸과 혼과 영이 온전하도록 성령이 이끄시며 한 단계 한단계 성령과 연합되게 하신다 

그러니 나의 죄된 본성이 다루심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 성령의 일에 굴복하지 않고

성령을 대적하며 막는 것이 내 육신의 생각인 것이다 

 

 

더 나아가 공동체에서 한 동역자로 사역을 하게 되는 일이 "나"라는 본성이 죽지 않으면

함께 멍에를 메고 밭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각 본성이 성령 안에 있을 때만 연합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성령이 한 사역으로 이끄실 때는 사도들이 함께 동역이 되었으나

그렇지 않았을 때 곧 바울과 바나바도 갈라 선 것처럼 성령이 그들의 사역을 따로 세우심을 

믿어야 한다  

바울이 옳고 바나바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특성과 갈아야 하는 밭이 다른 것이다 

돌밭도 있고 산비탈 밭도 있고 논밭도 있듯이 그곳에 가장 적합한 일군이 있는 것이다 

행여 적합해 보이지 않는 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신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실수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함께 동역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자를 찾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일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강력한 지도자 되셔야 한다

우리는 주님이 시키시는 일에 순종하며 협력하는 존재들이다

그 안에서 사랑이 이루어질 때 강력한 역사가 이루어진다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 많고 사건 많고 분란이 많은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이 권한 말은 이것이었다

사랑은 이런 것인데 그렇게 행하는 공동체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며 강력해질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 맺게 하심으로 보증하신다

 

그러니 함께하는 공동체가 모두 같은 성향과 특징을 가진 무리가 되어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강퍅함을 버려야 한다 

각자의 성향과 특징을 어떻게 하면 주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활성화시킬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랑으로 하나 됨에 먼저 수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때를 환란 안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지금은 각자가 자신이 보는 것으로 또 아는 것으로 열심을 내며 연합되지 못하는 

교회의 현실들에 있다

하지만 베드로가 주님을 3번 부인한 후에 비로써 자신이 은혜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 전적인 주님의 사랑으로 이루셨음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이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3번을 물어보셨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주님을 3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까지

거짓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이 모두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말할 수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주님을 죽는데 까지 따르겠다고 말을 했으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자신을 뼈저리게 체험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끔찍하게도 자신의 죄성을 철저히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의도였고 베드로의 으뜸 되기 좋아하는 성향을 그렇게

낮추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위해 미리 기도 해 놓으셨기에 가룟 유다처럼 

잃어버리지 않으셨다 

 

주님 앞에 사랑의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면 마지막 때에는 두 부류만 남는다

가룟 유다처럼 스스로 자신을 심판해 버리는 자

베드로처럼 남겨졌을 때 비로써 자신의 누더기 같은 의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

아무리 현재 열심히 하며 목숨을 드리는 순교를 각오한다 해도 환란에서는

대부분 배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또 다른 섭리이다

죄가 깊은 곳에 은혜도 깊어지는 것이 그렇게 평생 주님을 위해 사는 것 같이 했으나

자신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때가 진정 회개의 날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는 일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악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함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높은 목표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삶에서

가장 우선이 되지 않으면 대부분 나를 사랑하게 된다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향한 원수의 가장 기만적이고 치명적인 공격은 종교적 열심과

스스로 자신을 고행의 길로 자존감을 낮추는 것이다

원수는 이러한 궁극적 추구로부터 우리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이다. 

 

그리고 원수의 전략은 우리로 하여금 삶 가운데 있는 죄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원수는 우리 스스로 바라보고 있는 대상처럼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계속 악을 상대하고 있다면 우리와 악은 함께 묶이게 된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묶이며 그분의 형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있는 죄와 허물을 무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가 믿음 안에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살피고

또한 우리 자신을 시험하라고 했다(고후 13:5). 

문제는 죄가 발견된 후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선과 악의 지식나무를 의지할 것인지, 아니면 생명나무를 의지할 것인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 더 선해지도록 노력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도록 할 것인지,

우리의 죄를 이기는 권능과 용서를 발견하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할 것인가 이다.

종교의 영은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권능대신 종교적인 활동을 대치하려고 추구하는 악령이다.

이 영의 주요 목표는 "경건의 능력은 부인했지만 경건의 모양은 유지하고 있는"

교회들을 차지하는 것이다(딤후 3:5).

이 종교의 영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마 16:6)이다.

 종교의 영은 마치 빵 속에 들어있는 누룩처럼 영향력을 행사한다. 

누룩은 오직 빵을 부풀어 커지게만 하여 외형상 큰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로 보이게 한다

그 이후에 거의 모든 타락의 원인이 되었던 교만을 확장시키며 결국은 분열한다.

사탄은 교만으로 부풀어 오른 어떤 사역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지 않으실 것이며,

심지어 그런 사역을 대적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발람 선지자가 꾀를 낸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의 전략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고, 선한 것들에 대해서조차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읽었으며, 또는 얼마나 많이 예수를 증거 했으며,

얼마나 많이 가난한 자들을 먹였는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일단 누룩이 빵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것을 제거하기가 심히 어렵다.

그러니 교만의 누룩을 제거하기보다 오히려 사랑의 누룩으로 덮어 버리는 것이다

 

레위기 제사법에서 모든 소제 무교병에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두 가지 제사에는 누룩을 넣어 빵을 만드는 제사가 있다

 

(1) 감사제의 화목제

“또 그는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의 희생과 함께 

누룩 넣은 떡을 그의 제물과 함께 드릴 것이요.”(레 7:13)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교제, 성도의 감사와 나눔을 의미한다.
누룩 넣은 떡은 제단에 불살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과 제물 드린 자가 

함께 먹는 교제의 빵으로 사용된다.
인간의 불완전함(누룩) 속에서도 하나님은 교제를 허락하셨다는 상징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였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2) 오순절(칠칠절)의 첫 열매

“너희 처소에서 가져다가 요제로 두 떡을 흔들되, 

그것은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 구워서 첫 열매로 여호와께 드리라.”(레 23:17)

오순절에 드리는 두 개의 떡은 누룩을 넣어 구운 떡을 하늘을 향해 흔들어 드린다
이는 이스라엘(유대인)과 이방인이 누룩 같은 연약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 강림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연합 공동체가 되었음을 상징한다.

성령의 강림하심에 교만의 누룩은 모두 소멸될 것이다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오늘은 여기까지 나눔을 하며 또 하루를 보냅니다

곳곳마다 주님오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왠지 우리 주님은 잠잠하신 것 같으시니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듯합니다

바로 당신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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