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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단편 묵상

같은 장소, 다른 선포, 다른 선택(아하스와 히스기야)

by GOTOKINGDOM 2025. 11. 17.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부터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왕에게로 가게 하매 그가 세탁업자의 터의 대로 윗못 수도구 곁에 서매(사36:2)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사 7:3)

 

 

< 짧은 믿음의 고백 >

삶의 여정 속에서 주님은 여러 모양으로 저를 다듬으셨습니다.
때로는 제 생각이 옳은 것 같았고, 사람들의 외면이 두려워서 침묵했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저를 시험하시고

사람이 옳다고 하는 것과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을 분별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어떤 경고나 말씀을 주셨을 때,
많은 이들이 믿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때문인데 저도 종교생활로 하나님을 섬겼고

율법 아래 삶이었으나 사실은 하나님이 그 종교성을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많은 신이라는 것 중에 참 신을 스스로 선택하여 찾게 하시려고 주신 자아입니다

자발적인 선택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워서가 아닌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처음엔 마지막 때임을 전해도 믿지 않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교인들에게

서운하기도 했고 안타까움으로 두려움을 주는 경고도 했지만, 곧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택함 받았다는 자만으로 나를 드러내고 높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묵묵히 신뢰하는 훈련의 자리였다는 것을요.

 

사람들은 큰 교회, 작은 교회 지도자와 은사자를  통해 전해지는 예언만 믿으려 했지만,
하나님은 작은 자의 순종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저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영향력 있는 지도자의 말을 더 신뢰합니다

미천하고 작은 자를 사용하신다 하여 하나님의 계시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영향력 있는 자도자들을 대면하지 못하는 미천하고 작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 하기에

그에 맞도록 눈높이를 맞추신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자를 사용하심은 또한 높은 자 곧 지도자들을 낮추시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깨어 준비시키시는 자라면 분명 높은 자라도 작은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사람에게 증명하거나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맡기신 일에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묵상 글과 직접 만남에서 전해지는 모든 내용을 상대가 믿든지 안 믿든지 

제가 더 이상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저 또한 주님의 도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전하는 자와 묵상글이 중요한 것이 아닌 당신이 지금 진정 주님과 동행하는지

당신의 신앙의 목적과 종말이 무엇인지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당신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 당신 자신이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그분이 친히 증거 하실 것입니다.

 

단지 이번에 나의 묵상을 통해 몇 가지 주의를 주셨는데 주님의 뜻만 이루어 지기를

더 간절히 기도로 구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연약한 자리로 다시 돌아갑니다 
제가 믿는 주님은 때가 되면 드러내시고, 남은 자를 통해 다시 일으키시는 분이시기에

저는 오늘도 그분 앞에서 조용히 제 마음을 다스립니다.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과 정결한 예복을 지키는 일

제 마음을 다시 점검하려 합니다.

오늘은 주님이 선택과 분별에 대한 두 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태껏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역시 성경에 등장하는 두 왕이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는 것은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부터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왕에게로 가게 하매 그가 세탁업자의 터의 대로 윗못 수도구 곁에 서매(사 36:2)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사 7:3)

 

 

성경 안에는 같은 장소에서 다른 두 존재의 선포가 있었습니다
그 선포는 두 명의 왕이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믿음의 시험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세탁자의 밭 שְׂדֵה כוֹבֵס (스데 코베스)
입는 옷이나 옷감을 씻는 곳
 깨끗하게 하는 장소
 정결을 회복시키는 자리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정결과 분별의 장소로 선택하신 자리입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유다를 치러올 때 아하스는 두려움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유다를 치려는 이유는 

• 아시리아(앗수르)는 급격히 팽창하며 주변 국가들을 위협했습니다
• 아람(다메섹)과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은 앗수르 치기 위해 동맹하자 했으나
• 유다 아하스가 거절을 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오히려 예루살렘을 치고 
• 아하스를 폐위시킨 후에 앗수르 치는 동맹에 유다를 끌어들이기 위해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사 7:6)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셨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했습니다.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길에서 아하스를 만나....

그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치 말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사 7:4-7)

 

연기 나는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는 말씀은 위에 사진을 보며 이해하면 됩니다

그루터기는 나무 밑동만 남은 것을 말합니다

부지깽이는 불을 밀어 넣고 정리하는 나무작대기입니다

연기가 난다는 것은 심히 노했다는 두 나라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아궁이에 부지깽이 중에 가장 짧은 것 곧 그루터기처럼 남은 것을 의미하며

심히 노하여 연기가 날찌라도 이제 곧 그루터기처럼 없어질 것이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람과 북이스라엘 멸망이 곧 온다는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그들의 실상을 알려주셨고 믿으라고 하셨고

또 징조를 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그 말씀을 믿지 않았고 거짓된 겸손으로 외식을 하였습니다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

너는 네 하나님께 한 징조를 구하되....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사 7:11-12)

 

그러나 이사야는 아하스의 속 마음을 다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도움을 구하기를 의도적으로 이끄시고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도 못하는 아하스는 거짓된 경건을 말로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사 7:13)

이사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아하스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왕이 아니었음에도 은혜 베푸심을 끊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매를 들지 않으시려고 잘못하는 아들에게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할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하스는 앗수르(세상의 힘)에 도움을 청하며 의지했습니다.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나는 왕의 신하요 왕의 아들입니다.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나이다.
원하건대 오셔서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소서 하였다.”(왕하16:7)

너무도 어리석은 아하스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사람을 의지하고 스스로 그의 신하요 아들이라 자칭합니다 

이것이 앗수르가 유다를 치는 통로가 될 줄은 아하스는 몰랐습니다

유다 위로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있었기에 앗수르 침공의 방패막이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사야의 메시지를 세탁자의 밭에서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사야로부터 전달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보다 눈에 보이는 강대국 왕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로 유다는 앗수르에 종속되어 조공을 받쳐야 했고

성전의 보물이 이방에 넘어가며 예루살렘도 아람과 북이스라엘과 같이 멸망의 씨가 되었습니다.

 

아하스는 세탁자의 밭에서 선포된 진리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같은 장소에서 다른 결과를 얻은 왕이 있습니다

바로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 왕입니다 

이번에는 진리의 말씀을 버리고 의지하였던 앗수르에 예루살렘이 포위됐습니다.

히스기야는 기혼샘에서 수로를 예루살렘 내부로 터널을 만든 왕입니다

그래서 앗수르 군사가 성벽을 둘러도 수로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앗수르왕이 보낸 사신 랍사게가 왕의 말을 가지고
똑같이 세탁자의 밭 큰길에 서서 외칩니다.

“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꾐을 받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그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사 36:18-20)

 

이곳에서 들리는 메시지는 아하스 때와 정반대였습니다.
같은 장소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사야가 선포한 정결함을 받는 곳이

사탄의 조롱이 선포되는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히스기야의 반응은 아하스와 다른 결론이 났습니다 

먼저는 아하스 때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듣기를 청하여 제사장들을 보내었습니다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린이 그가 풍성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내가 그를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사 37:6-7)

 

히스기야가 어떤 믿음을 선택하기 전에 또다시 앗수르 왕이 조롱하는 글을

히스기야에게 보냅니다 

히스기야가 그 글을 들고 성전으로 올라가 여호와 앞에 펴놓고 기도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아하스에게 명하셨던 "징조를 구하라"를 아하스는 하지 않았지만

히스기야는 기도로 구한 것입니다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 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다"(사 37:30)

 

하나님은 아하스에게도 그랬듯이 히스기야에게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다른 선택을 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한 번 더 히스기야를 앗수르 왕의 조롱하는 글 앞에

몰아세우신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더 이상 사람을 의지 할 수 없도록 코너로 몰아붙이신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믿음의 결과는 사람의 노력과 열심히 아닌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예루살렘을 구원하십니다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군대 18만 5천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사 37:36)

 

히스기야는 세탁자의 밭에서 정결과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세탁자의 밭 = 정결과 결단의 자리
옷을 씻는 장소였던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마음을 씻고 믿음을 선택하는 자리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항상 두 음성이 선포됩니다.


하나님의 음성 이사야 “두려워하지 말고 구하라” 구원
세상의/사탄의 음성 랍사게 “헛된 믿음을 갖지 말라” 멸망

문제는 장소가 아닙니다.
누구의 말을 듣고 믿는가가 우리의 길을 정합니다.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믿음의 결말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그 기회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시는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심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아하스는 악인이었고 히스기야가 의인이라 기회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악한 왕일찌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을 열어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하스도 히스기야도 하나님 보시기에 이쁜 자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아하스는 회개를 하지 않았지만 히스기야가 회개하여서 구원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회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히스기야는 자신의 옷을 찢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자신이 무엇을 회개하고 애통하였는지 마음을 내어 비추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가 회개를 해서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량없는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이십니다 

우리의 회개는 결코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 회개 또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려고 허락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하스는 유다 12대 왕입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상을 섬겼고(왕하 16:2)

자신의 아들을 힌놈의 골짜기 몰렉의 불로 지나게 하였고(대하 28:3)

높은 산 푸른 나무 아래 우상에 제사와 분향을 하며(왕하 16:4)

성전의 기물 훼파와 성전 문을 닫아 버렸고 산당들을 세웠고(대하 28:24)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쳐들어 왔을 때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의지(왕하 16:7)

앗수르에 성전과 왕궁의 보물들을 바쳤고(왕하 16:8)

하나님의 제단을 옮기고 앗수르 제단을 따라 변경함(왕하 16:10-16)

 

아하스는 이렇게 많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도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도 붙들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는 유다 13대 왕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지 않았을까요?

히스기야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침공하여 왔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먼저 묻지 않고 앗수르 왕에게 스스로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말하며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왕하 18:14)

“그때에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성전 문과 기둥에서 입힌 금을 벗기어
그것을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왕하 18:16)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15년 생명을 연장받고 교만하여 자신을 과시합니다

바벨론 사자들이 왔을 때 성전의 보물과 군사 내탕고를 공개합니다

이 사건으로 훗날 바벨론 침략으로 궁전의 모든 보물이 옮겨지는 심판을 받습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에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대하 32:25)

 

이렇게 히스기야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않은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아하스와 달랐던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마다 어린아이 같이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히스기야에게 언제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같은 장소, 다른 선포, 다른 선택을 하는 그 누가 되었어도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모두 다르다 하여 우리 삶의 저자(기록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공이시고 

내가 그분의 여정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주님의 길 안에 함께 걷는 자들을 이사야는 " 남은 자"라고 합니다

 

1. 이사야(יְשַׁעְיָהוּ, Yesha‘yahu)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 어근: יָשַׁע (야샤, “구원하다”) + יָהוּ (야후, “여호와”)
  • 뜻: “여호와께서 구원이시다” 또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이사야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선언입니다.
그의 사역 전체가 심판 중의 구원, 멸망 중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그의 아들 이름들도 그 구속사의 ‘표징(sign)’으로 주어졌습니다.

 

2. 스알야숩(שְׁאָר יָשׁוּב, She’ar Yashuv) –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 שְׁאָר (she’ar) = 남은 자
  • יָשׁוּב (yashuv) = 돌아오다

이 이름은 심판 한가운데서 “회복”라는 하나님의 소망의 표징입니다.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더라도 남은 자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3. 아하스(אָחָז, Aḥaz) – “붙잡다, 움켜쥐다”

  • 어근: אָחַז (아하즈) = 붙잡다, 움켜쥐다, 움켜쥠
  • 뜻: “붙드는 자”, 그러나 무엇을 붙드는가에 따라 선과 악으로 갈립니다.

아하스는 믿음으로 여호와를 붙잡지 않고, 앗수르를 붙잡았습니다.

이사야 7:9 –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하리라.”
아하스는 하나님 대신 사람의 도움을 붙잡은 왕.

 

아하스의 이름은 “붙드는 자”이지만, 그는 잘못된 대상을 붙든 자로 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와 스알야숩을 보내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던 겁니다.

그에게 “너는 앗수르를 붙잡았으나, 나는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겠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이사야(“여호와는 구원이시다”) →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구원의 역사는  ‘남은 자’를 통해 성취될 것입니다.

 

 

오늘날 저와 비슷한 길을 걷는 분들께 응원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의 전하는 대언을 먼저 믿지 않았고
나중에 다른 사람(목사, 큰 교회)을 통해 같은 말을 듣고 나서야 받아들였다는 것은,
당신이 받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반증합니다.

 

성경에서도 그렇습니다.

선지자의 말은 먼저 작고 미천한 자를 통해 임하셨고,

지혜롭다는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고,
나중에야 그것이 하나님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스스로 아이라 말할 줄 모른다 했고,
아모스는 선지자도 아닌 목자였고,
다윗은 집안에서도 막내였으며,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크게 보이는 사람을 통하여가 아니라
작아 보이는 자를 통하여 그분의 음성을 먼저 주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드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다는 잘못된 오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해야 받으시는 하나님 아니십니다

하나님 스스로 충분하시고 영광스러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원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원함인 것이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뭔가를 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고행을 하며 거룩에 이르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선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명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이지요 

 

너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가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 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욥 35:5-8)

이 말씀은 엘리후가 자신이 의롭다고 말을 하는 욥에게 하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의와 악은 하나님께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하늘에 닿기 위해 바벨탑을 쌓는다고 하여 하나님께 이를 수 없고

아무리 인간이 의롭다고 스스로 생각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하루에 홍수로 멸하시기도 합니다 

 

발람은 자기 명예와 자기 체면과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 이미 주신 말씀보다
사람들의 기대와 대가를 더 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영적 눈이 어두워졌고 바로 옆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 있어도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발람이 일평생 타고 다닌 나귀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이는 곧, 겉으로는 보기에 작은 자가 자신의 자리를 지킬 때 

실제로는 더 깊이 하나님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일에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뜻을 구하는 깊은 자리에 묵묵히 기다리는 시간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사역자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종이 되어

정작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인지 점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귀는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든 것을 보고 자신을 타고 있는 발람을 지키려고

여러 번 발람에게 실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화가 난 발람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세 번이나 때리게 됩니다 

그때 나귀가 입이 열립니다

나는 네가 오늘날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민 22:30)

 

바로 이것이 승리입니다.

나귀는 일평생 자신의 사명에 묵묵히 순종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발람은 자신 곁에서 일평생 함께 하였던 나귀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함께 하고 있는 공동체 지도자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요 말씀 앞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던 나귀처럼 하나님을 뵙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모든 일이 함께 보고 계십니다

모든 시간 함께 하시고 계신 것을 알고 있는데 어찌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겠습니까

 

의 사명은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하고, 준비하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 여정 중에 함께 가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려고 전하고 권면하는 것이지

모두가 나같이 살아야 된다 내가 다 옳다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심같이 그 은혜받은 나이기에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그 기회를 붙들기를 바라며 묵묵히 내 자리를 지키고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이 듣지 않았다고 하여 당신의 전하는 복음이 헛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나중에 큰 목사나 은사자에게서 들었다고 믿을만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당신의 순종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사람은 인정하지 않아도 하늘에서는 이미 기념책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심하며 유의해야 할 것은 이 길은 끝까지 겸손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하는 대언이나 계시를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 하여 아픔이나 낙망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는 모두 은혜입니다.

먼저는 당신에게 주시는 은혜이며 또한 당신 주변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전하는 말을 그들이 믿지 않는다 하여 당신에게 아픔이나 상처가 된다면

그 상처가 오래되면 “나는 깨달았고 너희는 못 깨달았다”라는 

영적 고립의 마음이 찾아오며 결국 당신은 그들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에게 이때 더 부드러운 사랑의 마음을 요청하십니다.

“예수는… 목자 없는 양들에게 긍휼을 먼저 가지셨다.”(마 9:36)

주위를 둘러보세요 

아직도 목자 없이 유리하는 불쌍한 양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당신이 주님 안에 거한다면 주님이 행하심대로 당신도 행해야 합니다 (요일 2:6)

주님 오실 때 준비되지 못한 자들을 보며 마음이 찢기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의 신부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다른 말을 선포하였을 때

아하스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선택해서 멸망을 초래했고,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선택해서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같은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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