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아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던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하시니라(요한복음 8:3-11)

오늘은 율법의 완성을 이루신 예수님의 참 사랑을 묵상하며 나누겠습니다.
율법은 죄를 발견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법은 발견된 죄를 회개에 이르도록
성령으로 교훈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구약에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 중에 읽을 때마다 답답하고
불공평해 보이며 억울한 공감대가 느껴지는 부분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어떻게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셨는지 살펴봅니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면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0:10)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함을 보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다 죽여…”(신 22:22)
본문 말씀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지만 율법에 합당한
고소 조건을 가지고 나타난 것입니다.
간음한 사람은 죽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율법으로 명하였으니까요.
그리고 이 여인이 간음한 현장에서 잡혀온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십니다.
그때 정죄하던 자들이 모두 떠나고 예수님도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여인은 그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정죄하는 율법을 완전케하신 실제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아주 단순하게 예수님의 표면적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으로만 끝이 납니다.
하지만 이 말씀 중에는 의문이 아주 많이 생깁니다.
그것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성령님께 들고 가서 여쭙고 배우기를 구하였습니다.
제가 배운 부분은 이렇습니다.
참고만 하시고 각자 받으신 마음의 감동대로 기도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일단 먼저 예수님이 이 여인의 간음죄를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정죄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물러갔고 예수님도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 것이지 이 여인이 죄 없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초림 목적은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셨으니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 여인은 반드시 마지막 날에 심판받을 것입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율법의 역할과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의 역할이
아주 잘 나타나는 현장의 모습으로 우리를 교훈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이런 일을 만든 이유가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만들기 위해
시험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시험하다”는 헬라어 πειράζω (페이라조, peirazō)입니다.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시험하다, 검증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지만,
여기서는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시험하다"라는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간음한 여인으로 율법을 이용하여 예수님께 올무를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돌로 치라”고 하면 로마의 사형 집행 권한 문제로 공격할 수 있고,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땅에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무엇이라 쓰셨을까요?
그에 대한 말씀은 성경 기록에 없습니다.
궁금하지요? 저도 상당히 궁금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말씀으로 함께 따라가 봅니다.
성경에서 민수기 5:11-31에 "의심받는 아내를 시험하는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에는 “길을 떠난 여자” 또는 “빗나간 여자”라는 의미의 동사
שָׂטָה (사타) - 빗나가다, 치우치다, 부정하게 되다
“어떤 사람의 아내가 실행하여 תִשְׂטֶה(티스테, tisṭeh) 남편에게 범죄하여…”(민 5:12)
여기서 "실행하여"라고 번역된 단어가 치우쳐(שָׂטָה, 사타)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이 간음을 밝히는 경우에 사용되었기에 우리말로 "부정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후대 유대법에 סוֹטָה (소타, ‘빗나간 여자’, ‘의심받는 여자’)라는 명사가 만들어져
"쇼타 의식"이라고 민수기 5장의 이 규례를 부르기 위해 붙인 이름입니다.
이 의식 자체는 간음이 확정된 경우가 아니라
“의심은 있지만 증거가 없는 경우”에 "하나님께 판단을 맡기"는 매우 독특한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분명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직접 말씀해 주신 율법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이렇습니다.
1. 실제로 아내가 간음을 행하는데 증거가 없을 때
2. 왠지 아내가 간음을 행하는거 같은 의심이 될 때
하나님이 이런 경우 판결법으로 주신 것이 "쇼타 의식"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결과를 보면 "아내에게 불공평한 법"으로 보입니다.
실제 아내가 바람이 났다면 당연히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바람이 난 거 아닌데 남편이 의심을 했다면 그 남편이 벌을 받아야
공평해 보이는데 고소한 남편은 무죄이고 아내만 죄가 있음 벌 받는 것입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만일 아내가 죄가 없다면 잉태할 것이라 합니다.
나를(아내)를 간통하는 것으로 의심하여 고소한 남편의 아이를 잉태하고 싶나요?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법을 주신 것일까요?
이렇게 말씀을 부분으로 읽게 되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이 말씀은 사실 "아내에게 불공평한 법"이 아니라 "아내를 위한 법"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율법을 이용하여 악법으로 사용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내쫓는 것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누구든지 음행 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8-9)
예수님은 남편의 마음이 완악함 때문에 아내를 내어 쫓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음행한 아내는 예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음행한 아내는 내어 쫓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들이 이 법을 악법으로 이용하여 무고한 아내를 부정하다 거짓으로
내어 쫓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을 이미 아시고 미리 대책으로 주신 법이
"쇼타 의식"인 것입니다.
그것을 실제로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유다는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말 2:11)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말2:14)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말2:15)
의심의 법을 행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킬 법을
모세가 미리 알려준 법중 하나입니다.
가나안 땅에 7 족속과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그곳에서 이방 신을 섬기는 딸들에게 미혹될 것을 모두 아셨습니다.
민수기 25장에 바알브올 사건에서 이미 그 일이 벌어져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염병으로 240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백성들이 가나안 여인을 보고 자신들의 아내를 버리기 위해 이용한 율법이
간음한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들이 증거 없이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여 내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였기에
실제로 "쇼타 의식"은 남편 쪽보다 억울한 아내 쪽이 더 원했다고 유대 전승에 말합니다.
정말 음행 한 아내라면 벌을 받겠지만 무고한 아내라면 거짓으로 누명을 씌워
내어 쫓기는 것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법이 되는 것이니까요.
잠언 말씀에도 있듯이 남자와 여자가 함께한 자취를 알 수 없다 합니다.
증거가 없을 때 이스라엘 그때 세대에는 여자를 계수하지도 않았습니다.
여자는 증인으로 인정도 안 했습니다.
그런 때에 남자들의 고소가 일방적이었습니다.
남편이 거짓으로 아내에게 누명을 씌워도 여자는 변론하고 호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쇼타 의식은 유일하게 여자에게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법이 된 것입니다.
여자의 억울한 누명을 하나님께서 직접 판결하시는 특별한 의식이 된 것입니다.
그럼 아내의 간통을 판결하는 절차 과정을 간단히 살펴봅니다.
남편이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지만 실제로 보거나 증인이 있는 것이 아닌 경우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 나아갑니다.
이때 남편은 아내를 위한 제물로 보리가루 십 분의 일 에바를 가져가는데,
기름이나 유향을 넣지 않습니다.
이는 죄를 드러내는 성격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여인을 가까이 오게 하여 여호와 앞에 세우고
거룩한 물을 질그릇에 담고, 성막 바닥의 티끌을 취하여 그 물에 넣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판결임을 상징합니다.

이후 제사장은 여인의 머리를 풀게 하고, 그 손에 기억하게 하는 소제물(보리가루)
곧 의심의 소제물을 여인의 두 손에 들려줍니다.
제사장은 저주를 가져올 쓴 물을 손에 들고 제사장은 여인에게 맹세를 시킵니다.
"네가 정결하여 남편을 속여 부정하지 않았다면 이 물이 해가 되지 않을 것이지만,
만일 부정하였다면 이 물이 네 몸에 들어가 저주가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인은 이에 대해 “아멘,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겠다는 동의입니다.
제사장은 저주의 말을 두루마리에 기록한 뒤, 거룩한 물에 씻어 그 글이 물에 섞이게 합니다.
저주의 말씀 자체가 심판의 근거로 물에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여인의 손에 있던 의심의 소제물을 취해 여호와 앞에 흔들고 한 움큼만
제단 위에서 태웁니다. 그 후 여인은 그 쓴 물을 마시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결과가 나타납니다.
만일 여인이 부정하였다면 그 물이 저주가 되어 배가 붓고 넓적 다리가 떨어지니
공동체 가운데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반대로 정결하다면 아무 해도 받지 않고 오히려 잉태하는 복을 얻게 됩니다.
이 전체 과정은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드러내시고 판결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부정한 일을 행했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판결 앞에 서 있을 수 있을까요?
부정한 일이 없었다면 누명을 벗기 위해 오히려 하나님 판결 앞에 서기를 더 원할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 전승에 이러한 사례들이 기록이 되어있고 무고한 아내들이 버림을 받는 일에
방패막이가 된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겨난 유대법이 아내를 부정으로 고소하는 남편도 정결하지 못하면
그 고소가 받아지지 않는다는 법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후로 쇼타 의식을 행하는 일이 없어서 그 의식 자체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씁쓸하기도 한데 그것이 어떻게 보면 정결한 남편이 없으니 고소자가 없고
결국 쇼타 의식을 행할일이 없으니 사라진 거 아닐까요?
그럼 다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봅니다.
먼저 억울하게 고소당한 아내 역할은 간음한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기억하시나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시험했다는 것이요.
예수님은 고소할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의심으로 예수님을 쇼타 의식 앞에 즉 율법 앞에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결하시기에 하나님 앞에도 율법 앞에도 저주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저주의 해를 받지 않고 잉태된 자가 간음한 여인이 되는 것이지요.
돌에 맞아 죽었을 죄인이 정결한 예수님을 통해 다시 생명을 얻었으니까요.
예수님은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으시는 암탉이시니까요.
간음한 죄인 홀로 예수님 아래 있었지만 돌로 치려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두
예수님 아래에서 떠나갔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아내의 부정을 밝히는 절차 중에 몇 가지만 영적으로 해석해 봅니다.
모든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의 부정을 밝히는 의심의 소제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먼저 보리가루 십 분의 일 에바는 기름도 유향도 두지 말라했습니다.
이는 초실절 무교절을 지내는 첫 보리 수확을 흔들어 요제로 드려진 어린양 예표입니다.
토기 כְּלִי־חָרֶשׂ(켈리 헤레스)는 흙으로 만들어진 평범하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다.
티끌 עָפָר(아파르)입니다.
그런 질그릇 안에 거룩한 물, מַיִם קְדֹשִׁים(마임 케도쉼)이 담깁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질그릇이고 그 안에 보배를 가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7)
그리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에베소서 5:26)
또 예수님은 자신이 주시는 물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
흙에서 지음 받아 티끌로 돌아갈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생명의 물을 담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과 말씀으로 우리 안의 숨겨진 죄가 드러나고 씻겨지며,
죄와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흙으로 돌아갈 인생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이 새 생명으로 잉태하신 의미처럼
세상이 우리를 부정하다 의심하며 고소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 생명의 물이 우리 안에 들어와 죄와 죽음의 사람을 씻어 새 생명으로 일으키셨다” 선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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