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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단편 묵상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

by GOTOKINGDOM 2026. 9. 2.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이사야 40:1-2)

 

"위로하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נַחֲמוּ 나하무)그 어근은 (נחם 나함)입니다.

"נחם 나함"위로하다, 불쌍히 여기다, 마음을 돌이키다

그래서 이사야 40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위로는 단순히 슬픔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가 왜 내려진 것인지

정확히 알고 회개한 자들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이 끝나고 죄악이 사함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친히 구원하시는 위로입니다.

그 위로가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다고 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복역의 때를 끝내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신약에 와서 누가복음 2장에서 매우 놀라운 장면으로 만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여기서 "위로"는 헬라어로 παράκλησις 파라클레시스입니다.

위로, 격려, 권면, 도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 위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부모가 안고 온 아기 예수님을 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29-32)

참으로 놀라운 장면입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것은 이스라엘의 위로였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를 보았다고 말하면서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합니다.

위로가 구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셨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시므온은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마침내 그 위로이신 그리스도를 자기 눈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야곱의 둘째 아들로 처음 등장합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이도 내게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창29:33)

히브리어 이름은 שִׁמְעוֹן-Shim‘on, 시므온입니다.

이 이름은 야곱의 첫째 아내 레아가 한 말과 직접 연결됩니다.

כִּי־שָׁמַע יְהוָה
키 샤마 아도나이
“여호와께서 들으셨다” 여기서 핵심 동사가

שָׁמַע(샤마) “듣다, 귀 기울여 듣다, 경청하다”입니다.

 

시므온의 이름의 시작은 그 어머니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함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고

마치 위로하여 덤으로 주신 아들처럼 고백하고 지은 이름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야곱에게 끝까지 사랑받지 못하는 이름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 하는 기계로다

내 영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49:5-7)

이는 그들의 누이 디나의 사건으로 세겜에서 피의 심판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 시므온은 모세에게도 축복을 받지 못하고 이스라엘 지파에서 빠졌습니다.

신명기 33장에 모세가 축복한 야곱의 총회의 기업에 12지파 중에서 시므온은 빠졌습니다.

그리고 기업의 땅 분배에서 시므온은 유다에 속한 땅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얻음이었더라"(여호수아 19:9)

 

시므온의 이름의 전례를 추적해 보니 위와 같은 내용들을 알게 됩니다.

신약에 와서 무슨 지파 사람인지 나타내지 않고 그 이름만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그 이름 뜻과 같이 성령의 음성을 "들으며"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들었고 성전으로 갔으며 마침내 보았습니다.

그리고 본 것을 자기 입으로 증거 했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시므온에게  감동이 된 부분이 있습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는 시므온의 개인적인 고통의 메임이나 죽음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말씀에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않을 것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도 너무 은혜로운데 시므온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평안히 놓아주신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백한 마음의 소망과 동일한 표현인 것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사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욱 좋으나"(빌1:23)

 

그러나 한 가지 더 위에서 살펴보았던 그 이름의 유래대로 보게 되면 야곱이 말한 저주에서 놓임을 받아

평안해진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야곱의 말에 그들의 칼은 잔해 하는 기계라고 했듯이 신약에 시므온도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예언을 합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눅2:35)

구약에 시므온은 자신이 스스로 세겜을 심판했습니다.

그 결과 야곱 중에서 나누이고,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신다 하셨습니다.

야곱 중에서 나누인 자는 레위입니다.

이스라엘 첫 장자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드려진 자들이 되었고 그들은 야곱 자손들의

기업 중에 나누어 배정되었습니다.

 

그럼 시므온은 이스라엘 중에 흩어버린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씨름하여 이겼다고 받은 이름입니다.

곧 믿는 것으로 끝이 아닌 선한 싸움으로 성장하는 자들에게 흩으셨다는 뜻입니다.

선한 싸움은 자신의 내면에 은밀히 숨겨진 죄를 드러내시는 성령님의 책망을 

달게 받는 자들에게 양날선 칼처럼 찔러 쪼개시는 성령의 역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바로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물론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 아래 마음이 찢어지는 애통함을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시므온이 그 기업을 유다 자손 기업에서 얻었듯이 신약에 시므온도

유다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평안히 놓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의 이야기는 그 이름의 전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에서 시므온은 아버지 야곱에게도 은혜를 받지 못했고

모세에게도 축복의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이사야 말씀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를 보시겠습니다.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계7:7)

하나님의 인을 맞은 144000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12 지파로 새 예루살렘 성문 위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섰으니 이스라엘 자손 12 지파의 이름들이라"(계 21:12)

 

이들은 어린양과 시온산에 서서 모든 하늘에 증인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4000 섰는데 ....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144000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14:1-3)

 

그런데 신약에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바라볼 때 그곳에 안나라는 선지자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36절은 매우 구체적으로 안나를 소개합니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안나가 선지자이고 그녀가 어느 지파에 속했고 누구의 딸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름만 단순하게 올려진 시므온과 다르게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셀은 히브리어로 אָשֵׁר 아셰르입니다.

아셰르는 복됨, 행복함, 복된 자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창세기 30장 13절에서 레아가 아셀이라는 이름을 지으면서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복되다 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야곱도 아셀을 축복했습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창30:13)

모세도 아셀을 축복했습니다.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33:24-25)

그러므로 아셀이라는 이름에는 복과 축복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안나는 바누엘의 딸입니다.

바누엘은 히브리어로 פְּנוּאֵל 프누엘입니다.

구약에서는 브니엘 또는 브누엘이라고도 번역됩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씨름하여 환도뼈가 위골 되었을 때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고 고백하고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바누엘의 딸 안나는 출가한 후 7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았고

과부가 된 지 84년 그리고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과 기도로 섬겼습니다.

안나는 7년을 육신의 남편을 섬겼지만 과부가 되어 84년을 성전에서 기도하며

참 남편되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메시아를 봅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보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라고 고백한 바로 그때,

안나도 그 아기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안나는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합니다.

 

안나는 성전에서 금식과 기도로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메시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본 것을 말했습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보고 그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안나는 아셀 지파 출신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아셀 지파는 북이스라엘 기업의 사람입니다.

북이스라엘 선지자가 남유다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과 기도로 섬기다가

메시아를 보고 남유다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구속을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남유다에 살면서 메시아를 보고 이방에 비추는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증거 합니다.

이들은 서로를 위해 메시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이스라엘로 부르셨지만 그들의 죄로 인해 나라가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12지파가 모두 한 아버지로 형제들이었지만 분열되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한 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도 그들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즉 사마리아인들을 개로 여기며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상관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 시대에 시므온과 안나는 서로를 축복한 것입니다.

 

성경은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말합니다.

잠언 20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

귀는 히브리어로 אֹזֶן 오젠입니다.

눈은 עַיִן 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로 듣고

하나님께서 주신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들은 것과 본 것을 전합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유대에 있는 모두가 메시아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언약대로 오셔서 많은 표적과 기사로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언약의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그것이 성경은 신비라고 말씀하며 창세전에 이미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감취 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7-8)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이사야 64:4 말씀을 이루신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실 것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메시아가 죽어 다시 살아나야 영이신 또 다른 보혜사 되신 성령님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방의 빛으로 보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이신 성령님은 온 열방의 빛으로 임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신 뜻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도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혜로워서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아래에서 그들과 똑같았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도망을 갔고, 누군가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쳤고, 누군가는 조롱했고,

누군가는 애통하며 울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비겁하고 악하고 연약함 모습들을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모두 다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그런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요3:16)

 

이것이 참으로 이사야 40장의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이 아닌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신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이 그 위로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도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성령으로 듣는 귀와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성령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명하신 일을 입으로 증거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보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나의 죄된 인성을 다스리시고 가르치신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므온은 기다렸고 안나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은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았을 때 선포했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성령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시고 회개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 두 고백이 함께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올려드립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