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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시리즈 묵상

1.구원 얻을 자가 적은 이유(그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

by GOTOKINGDOM 2025. 11. 2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눅4:25-27)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자신을 거절하는 무리들을 향해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를 언급하셨다.
온 땅이 심판과 기근 아래 있었을 때, 하나님은 모든 과부에게 은혜를 보내지 않으셨고,

엘리야를 오직 시돈 땅 사렙다의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엘리사 시대에도 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으나, 이스라엘 누구도 아닌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만 치유가 임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단순한 역사를 되짚으신 것이 아니라, 말세에 반복될 하나님의 방식,

곧 다수의 심판 가운데 일어나는 ‘선택적 은혜’를 보여주신 것이다.

 

 

오늘부터 흐름이 멈추면 바로바로 나누어 묵상글을 시리즈로 올려본다 

완성한 글을 올리려다 미뤄둔 묵상 글이 너무 많이 쌓여있다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 되어 주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말씀을 재단하는 죄를 범하게 되어

회개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집중하며 글을 올리려 한다 

주님께서 필요에 따라 양식을 나눠 주실줄 믿고 나는 그저 기쁘게 순종하여 드린다 

할렐루야!


은혜는 모두에게 흘러가는 것 같아 보이나, 마지막 때에는 믿음의 태도와 마음의 상태에 따라

오직 극히 소수에게만 머무르게 된다.

엘리야 시대의 사렙다 과부는 오직 한 사람이었고, 엘리사 때의 나아만 역시 한 사람이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 안에 있었던 무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바깥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소수에게 은혜를 보이셨다.
예수님은 바로 이 구조가 마지막 때에도 그대로 반복될 것임을 경고하심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자라나셨던 나사렛에는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신 말씀이 은혜로움을 기이히 여겼지만(눅4:22)

요셉의 아들이라는 육신적 예수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편견의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늘 함께 신앙생활하던 특별하지 않던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저 사람이 이렇고 저런 사람인데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지? "누군가에게 들었겠지"

혹은 "어디서 카피했겠지"라고 판단하고 그가 전하는 말씀의 메시지까지 무시해 버린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받으심은 성령이 임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승리하신 후에 

이미 성령의 권능으로 그 소문이 사방에 퍼져 있을때였느데도 불구하고

믿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사람 보는 마음이 얼마나 고정관념에 묶였는지 말하는 것이다 

함께 한 공동체로 살아가며 그 사람의 변화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의 삶이

항상 "나"라는 중심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내가 있어야, 내가 해야, 내가 맞아.... 등등으로 언제나 "나"라는 숨겨진

마음의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성경 가르침의 인물로  솔로몬과 욥으로 사람의 의와 성령이 드러내시는

내면의 숨은 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은 풍요롭고 평안할 때는 너그럽게 베풀며 인자로울 수 있다

그러나 환란이 닦치면 모든 사람의 속 마음이 다 드러난다

의인들도 평안할 때와 환난이 닥칠 때 드러나는 마음의 차이가 매우 크다는 사실이다.

평안할 때의 선행과 겸손은 때로는 인간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환난이 닥치면 그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동기와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솔로몬은 평안과 지혜, 부와 영광의 절정기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전도서 2장에서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심었으며”(전 2:4)

“내가 세웠고, 내가 만들었고, 내가 모았고, 내가 누렸고”라는 표현을 반복한다.

여기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내가”라는 고백은 단순한 자랑이 아니라 타락 이후에

자신의 속마음을 정직하게 드러낸 고백이다.

 

젊을 때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성전을 건축하고 나라를 세웠지만, 마음이 교만해지고

우상에게 미혹되자 그 모든 선한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으로 둔갑해 버린다.

전도서는 솔로몬이 타락한 뒤에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기록한 회개의 책이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중심에 둘 때 모든 업적이 헛됨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욥도 고난 이전에는 자신이 행한 의로움과 선행을 자연스럽게 자랑하는 모습을 보인다.

욥기 29장에서 그는 “내가 행한 의가 옷과 관 같고”(욥 29:14),

“내가 맹인의 눈도 되고 저는 자의 발도 되며”(29:15)라고 말한다.

"내가 행한 의로움, 내가 도운 사람들, 내가 눈물 닦아주고, 과부를 돕고,

줄인 자를 먹이고…"여기서도 "내가"라는 말이 반복된다

욥의 삶은 실제로 의로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행한 그 선한 일들을 스스로 "나는 의인’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욥기 30장에 이르면 그의 마음의 깊은 곳이 환난 앞에서 폭로가 된다.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내가 나의 양 떼 지키는 개들보다도 못한 그들”(욥 30:1)이라고 생각하며

그 말속에는 자신이 마음속에서 품고 있었던 우월감과 자만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평안할 때는 의롭게 보였던 욥의 내면이, 환난 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욥을 무너뜨리기 위해 환난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욥을 더 순전한 믿음으로 다듬기 위해 자기중심적인 내면의 숨겨진

‘자기 의’를 드러내게 하신 것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느니라”(삼상 16:7).

중심이란 환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변동되지 않는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예수님도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 7:18)고 하셨다.

평안할 때는 모든 나무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비바람과 폭풍이 불면 그 나무가 어떤 뿌리를 가지고 있었는지 드러난다.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무는 넘어지게 된다

믿음도 그렇다. 풍요와 평화의 시기에는 모든 것이 의로워 보이지만, 시련이 올 때에야 그 뿌리가 드러난다.

뿌리가 깊이 자리 잡지 못한 나무는 그 열매가 좋을 수가 없다

 

솔로몬은 타락을 맛본 후 전도서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자기 의를 의지하던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솔로몬은 진짜 의가 어디에서 오는지 깨달았다.

욥도 고난 끝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만 들었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그는 고난 속에서 자신의 의가 무너지고 하나님만이 의의 근원이심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영광도, 욥의 의로움도 그것이 ‘평안 중에 누리는 의’ 임을 드러내신다.

우리의 의는 환난 앞에서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만이 환난 속에서도 서게 한다.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환난은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드러내는 자리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솔로몬과 욥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진리다.

평안할 때의 의로움은 시험되지 않은 것이며,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겸손과 순복만이 참된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함을 자랑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재능과 선행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마음을 기뻐하신다.

 

이 구원의 패턴이 동일하게 예수님 시대에도 연결이 되며 또한 마지막 때의 경고의 말씀으로 주어졌다

"나 자신의 옳다 함"이 중심이 되어 있으며 진리의 흐름을 깨닫지 못한다

성령의 역사와 능력과 은사들이 행하심은 구원이 목적임을 알아야 한다

쉽게 말해 성령의 역사와 능력과 은사가 나타나지 않아도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말씀처럼 성령의 역사와 능력과 은사가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사역이라는 의를 나타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큰 죄인이라서더 큰 은혜를 받았구나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증거 하라는 뜻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모두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성령의 능력이나 은사가 없는 곳은 죽은 교회요 귀신이 쫓겨나고 방언을 말하며 예언과 신유의 은사가 있는 곳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라 여긴다그러나 고린도 교회를 책망한 바울 사도가 말했듯이 그 모든 것을 자랑하는 자는아직 어린아이라고 말을 했다어떻게 성령의 은사를 행하는 자들이 어린아이 일수가 있나 믿음이 없이는 이런 일들을 행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바울이 그들을 어린아이에 비유한 것은 그 나타나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사람을 추종하기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과 동행하며 만족함을 얻는 이들은 이 모든 은사가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는다주님이 필요하시면 은사를 나타내실 것이요 사람의 중심을 다 아시는 주님이 그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역사하심을 알기 때문이다이렇게 두 부류의 종류들이 잘 나타나는 말세 교회 현상이 계시록에 기록이 되어 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 2:19-20)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계 2:24)

 

자칭 = 소위  ὡς λέγουσιν (호스 레구신)
뜻: “그들이 말하길”, “그들이 그렇게 부르기를”, “본인들이 주장하듯”

이 표현이 바로 한국어 성경에서 “소위”로 번역된 부분입니다.

헬라어 ὡς λέγουσιν은

‘남들이 말하길’, ‘자칭~이라 하는’, ‘스스로 그렇게 주장하는’
이라는 뉘앙스로 사용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깊은 영적 지식’이라 가르친다는 뜻이다.

 

참고로 니골라당의 교훈 묵상글을 보면 좀 더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다 

https://idea5936.tistory.com/entry/니골라당의-교훈과-자칭-선지자-이세벨

 

니골라당의 교훈과 자칭 선지자 이세벨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gotokingdom.com

 

 

주님이 "내 종들"이라 하셨으니 일반 성도들은 아닐 것이다

목사들이나 영적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 자칭 선지자 이세벨에게 꾐을 받는데 그들은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고 한다

그 종들은 자신이 현재 체험하고 있는 것이 행음인 줄 모를 것이다 

대부분 성령의 역사로 믿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주의 종들이 꾐에 걸려드는 것이다 

그들이 참여하는 식사가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인 것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회에서 그 교훈을 따르지 않고도 남아 있는 자들이 있다

생각해 보면 목사나 지도자들도 모두 그 교훈이 옳다고 따르며 배우고 있고 

많은 체험을 하고 있는데 평신도가 그에 반하는 신앙으로 그 교회 남아 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곳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주님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가르침에도 어떤 능력과 이적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그들이 원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되시기에 주님만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뿌리를 박고 세워진 나무이다

 

이 남아 있는 자들이 받는 상급을 보라 그 누구보다도 귀한 것을 주신다

"만국을 다르시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트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계 2:26-28)

성경 전체에서 “샛별”은 단 한 분을 가리킴이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샛별이라.”(계 22:16)

그들의 마음의 중심을 알고 계신 주님이 자신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누가 "나는 쇠하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라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침례 요한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음에도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은 

우선은 침례 요한이 먼저 자신의 사명의 끝을 인정하고 순종해야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모두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을 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교회끼리  정죄하고 판단을 하며 서로 강해 지기만 한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이용하는 어린아이같이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 모두 다 같은 죄인으로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 회개하여야 한다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 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 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누가복음 13:23-30

 

이 말씀을 이어서 다음 편 묵상으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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