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 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 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누가복음 13:23-30
이 글은 시리즈 묵상이며 1편 구원 얻을 자가 적은 이유 이어서 계속 진행을 해본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은 찾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힘쓰는(물리적 힘이 아닌 마음의 원함을 말한다) 자가
들어간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좁은 문은 처음부터 열린 상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집주인이 열어 주었다는 말은 없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라고 한다
열려있는 문이니 닫는다는 말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럼 왜 문이 열려있음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것일까?
다른 말씀에는 "찾는 이가 적다"라고도 말씀하신다
또 다른 말씀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감"에 대한 말씀도 있다
모두 다른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이지만 모두 "들어감"이 목적이 되어있다


위에 그림처럼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설명들이다
예수님이 저들에게 "너희를 모른다"하실 때 그들의 답변을 보면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길거리에서 가르쳤나이다"라고 한다
이들은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저 길거리에서 가르침을 받고
먹고 마심에 머물렀던 자들이다
이들은 오병이어를 먹고도 예수님의 깊은 가르침에는 동참하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렵다고 모두 떠나버린 자들이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들이 교만했을 수도 있고 욕심이 많아서 일수도 있겠다
그 모든 것이 아직 하늘 양식을 알지 못하고 육의 양식에만 열려 있기 때문이다
오병이어를 먹었던 자들의 원함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언제든지 떡과 물을 공급할 수 있고 적당히 우리를 간섭하지 않고 길에서 가르침을 받아
언제든지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자신들이 원하는 왕을 원했던 것이다
이것은 불신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나를 다스리는 왕으로 내 안에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단순히 나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창조주 되시고 왕이시며
심판자 되시고 아직도 우리의 중보를 쉬지 않고 계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 누가 보아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다 하신다"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이들이 이 말씀을 "고운 가루가 되면 들어간다"라고 자신을 부쉬고 맷돌에 갈아
고운 가루가 되어야 한다고 영적으로 설명을 한다
그들의 말을 영적으로 해석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며 잘못 이해하면 인간의 노력과 경건의 훈련으로
가능하다는 잘못된 진리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고운 가루라도 바늘귀에 넣어보라 쉽지 않다^^
말씀 그대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다 하신다
그래서 좁은 문을 들어가기 위해 힘쓰라는 뜻은 성령을 의지함에 힘쓰라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성령을 구하지 않고 내가 할수 없는 일은 성령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닌 성령님께 모든 의지를 드리며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것이다
"구하여도 못하는 자들이 많다"는 말이 성령님이 누구에게는 함께하시고 누구에게는
제한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하시지만 성령이 이끄심대로 복종하지 않기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으로 주시는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심에 응답이 아닌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께서 각 자녀들에게 맞도록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다
그 주권에 굴복하고 신뢰하는 것이 성령으로 인도받는 삶이다
그렇게 성령의 민감함으로 성령님께 붙잡혀 사는 자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없어져 간다
영적 감각이 커지면 자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이 분리됨을 알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내 생각을 버리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이 쉬워진다
누구나가 다 이렇게 성령을 좇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말씀 그대로 믿고 자신이 순종하도록 의지를 사용하여 선택하며 나아갈 때
때로는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지만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건강한 자는 넘어지지 않는 자가 아니다
넘어졌을 때 바로 일어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자는 능력이나 은사자가 아니요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구하고 또 구하며 성령으로부터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고 힘쓰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계시록 11장의 흐름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두 증인이 전하는 말씀과 권능은 성령의 마지막 강권적 역사와도 같다.
그러나 그들의 사역이 끝나고 죽임을 당하면, 하늘로 올려지는 영광 가운데
성령의 특별한 돌보심은 마감되고, 땅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 칠천 명이 죽는다.
이들은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두셨던 것처럼
우상에게 무릎 꿇은 무리의 상징적 심판을 받는 자들이다.
그러나 지진 가운데서도 남아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계시록은 이들을 이어서 등장하는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 부른다.
오늘은 여기까지 정리하고 다음 편으로 두 여자의 존재와 남은 자를 좀 더 깊이 묵상해 보기로 하자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12:6)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계12:14)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헤 섰더라(계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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