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가 아이를 ㅂ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계12:2-5)

이 글은 1,2 편에 이어서 시리즈로 연결되는 묵상이다
오늘은 먼저 전체 연결이 되도록 정리하며 시작한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다.
좁은 문은 닫혀 있는 문이 아니라 이미 열려 있는 문이다.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눅23:45)
영혼의 닻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히6:19)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20)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3:8)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4:1)
문제는 문이 좁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아가 그 문을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하셨다.
종교적 열심은 있지만 성령께 굴복하지 않는 자들, 기도는 하지만 자기 뜻을 내려놓지 않는 자들,
믿음을 말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거스르는 자들은 문 앞까지 와서도 들어가지 못한다.
좁은 문은 본질적으로 성령이 이끄시는 길이며, 나를 온전히 굴복시키는 자만이 그 길을간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은 이 진리를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바늘귀는 몸을 낮추고,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야 통과할 수 있는 문이었다.
이 말씀은 재물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이 붙들고 있는 자기 의, 자기 계획,
자기 명예를 내려놓지 못하는 본성 전체를 가리킨다.
그래서 예수님은“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셨다.
성령 없이 좁은 문을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령의 인도는 우리를 낮추며, 순종하게 만드시는 은혜의 역사이다.
좁은 문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님께 전적으로 굴복해야만 통과되는 길이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두 인물을 예로 드셨다.
엘리야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시돈 땅 사렙다 과부에게로만 보내셨다.
이 여인은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할 만큼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양식을 아들과 먹고 그 후에는 양식이 없는 완전히 가난했고,
그럼에도 떡 한 조각을 엘리사에게 내어 놓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사렙다 과부는 좁은 문을 통과한 여인의 예표이다.
자기 뜻이 없고, 말씀 앞에 철저히 낮아지고, 죽음을 앞둔 절망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이다.
이 여인은 계시록에서 여자가 낳은 아들이 하나님께 들림받는 첫 무리와 연결된다.
말씀 앞에 가난하고 작은 자들, 성령께 온전히 굴복한 자들이 들림받는 첫 열매로 나타난다.
이 여자는 세상에서 비천한 자이지만 늘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신의 것을 쌓아 놓지 않았다
그는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소망의 양식으로 삼았을것이다
그리고 중요한것은 그 여자는 아들을 살리려고 종으로 팔지 았았다
이 말은 육신의 아들이 죽는 것을 참아보지 못해 자신의 품에서 떼어낸 하갈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소망을 가진 여인은 이 땅이 아닌 육신이 죽어도 주님 품에 안겨야 된다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사렙다 과부는 그것을 아는 여인이다 마지막 양식을 아들과 자신을 위해 먹고
죽기를 각오한 것이다
이런 맥락은 엘리사 때에 선지자 생도의 과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었다
엘리사가 기름병에 기름이 가득 채워질것이라 축복해 주었던 사건이다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왕하4:1)
이 여인은 자신의 두 아이를 종으로 팔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구하고 있다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여인은 자신의 아이들을 지켜야한다
사렙다 과부는 이 모든 하늘과 땅의 영적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존재들이다
반면 예수님은 엘리사 때에라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어도
수리아 사람 나아만 한 사람만 깨끗함을 얻었다고 하신다
나아만은 겉으로는 위대하고 존귀한 장군이었으나 속은 문둥병으로 썩어가던 자였다.
그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마지막 때의 종교 지도자와 같다.
겉은 화려하고 명성이 있으나 내면은 말씀 앞에 떨림이 없이 부패해져 있다.
그러나 나아만은 주위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그 인품이 좋았다
오늘날 종교 지도자들도 그 인품이 존경받는 사람들이 있다
나아만이 자신의 종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겸손한 마음이 있었기에
그가 낮아지는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요단강에 일곱 번 내려가는 일은 그의 자아가 부서지는 과정이었다.
그가 굴복할 때 문둥병이 떠났고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다.
나아만은 마지막 때 환란 중에 구원받을 두 번째 무리, 곧 두 번째 여인이 광야에서
한 때 두 때 반 때 양육을 받지만 환란을 통과하며 정결해지는 무리의 예표이다.
계12:6 과 14는 같은 여자 같아 보이지만 이 세상의 시간 계념에서 다른 무리들이다
때와 장소가 다른다 첫번째 여자의 아들은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려갔다
그러나 두번째 여자에 대하여는 남은 자손이 용과 싸우게 될것이란 말씀으로
환란때로 들어감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들은 들림받지는 못하지만 환난 속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자기 생명을 버리며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순교로 예수를 증거하는 자들이다.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12:17)
계11장에는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두 증인의 사역이 등장하고
계12장에는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 같은 존재의 여자와 남은 자손이 등장한다
계13장에는 두 짐승이 등장하며 이들이 마지막 7 나팔이 불어질때 사건이 전계된다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선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앉아 있으나
너희는 밖에 쫓겨나 울며 이를 갈리라”고 하신 말씀을 여기에 겹쳐 보면,
좁은 문을 통과하는 자와 문 밖에 남는 자의 기준은 혈통과 종교적 신분이 아니라
삶의 영적 근원에 있는것 같다.
예수님은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은 지리적 출처가 아니라
영적 근원, 즉 어떤 영에게 속했느냐는 말씀이다.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의 삶과 열매는
하나님의 영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밖에 쫓겨나 울며 이를 간다는 것은 너무 분하고 억울할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종교의 열심인 자들은 한번도 자신들이 잘못 되었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었으니까
눈에 보이는 행함으로 자신의 명성과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과 칭송을 받은것이다
예수님은 이 행함이 잘못되었다 말씀하심이 아니라 그들의 받을 상을 이 땅에서
이미 다 받아버렸기에 하늘에서는 기록이 없는 것이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여자는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즉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교회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첫 번째 여인은 아들을 낳아 그 아이는 들림을 받고,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옮겨진다.
이는 사렙다 과부의 영성을 가진 자들, 성령께 완전히 굴복한 첫 열매를 의미한다.
이 여인이 낳은 아들을 아이라고 말하는 것은 철저히 주님을 의지하는 의존적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즉 교회 안에서 아들의 자리에까지 이르는 자들이 있다
그 아들이 상속자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예수님과 동일하게 주어진다
두아디라 교회에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고 남아 있는 자에게 주신 상급과 동일하다
이들은 환란을 격지 않고 "휴거"무리가 되는것 같다
그 아이가(τέκνον) 하나님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ἡρπάσθη – 하르파조)”
계 14:1-5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144,000
하나님의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른다
이 여자가 낳은 아들은 어린양 예수님과 함께 시온산과 하나님 보좌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첫번째 이긴 자들이다
계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을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른다
두 번째 여인은 광야에서 양육을 받지만 환란의 때를 지나야 하고,
그 여인의 남은 자손은 용과 싸우며 목숨을 내어놓는다.
이들은 첫번째와 다르게 하나님 보좌 앞에 서있지 않고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가에 서있다
그리고 그들은 144000인들만 부르는 새 노래(계14:3)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무리들이된다
이것은 나아만의 영성을 가진 자들, 낮아짐을 통해 환란 속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게 되는 자들이다.
두 무리는 모두 은혜로 구원받는 자들이지만 그 과정과 시기가 다르다.
성령께 굴복하는 깊이 또한 다르다. 첫 무리는 성령께 모든 것을 내어드린 자들이며,
두 번째 무리는 환란을 통해 굴복을 배우는 자들이다.
마지막 때 좁은 문은 단순한 도덕적 엄격함이나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성령께 자신을 넘겨드리는 문이다.
사렙다 과부처럼 가난하고 작은 자로 낮아지는 것, 그리고 나아만처럼 자아의 높음을 꺾고 요단강으로 내려가
자신을 일곱번 죽이는 완전한 항복으로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좁은 문이다. 좁은 문은 성령의 문이다.
성령께 굴복한 자는 그 문을 지나 생명으로 들어가고,
성령을 거스르는 자는 문 앞에서 아무리 구해도 들어가지 못한다.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하나님이 찾으신 자들은 이스라엘의 혈통 가진 다수가 아닌,
성령께 굴복하는 믿음의 두 부류였다.
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은 동일한 두 부류를 세우신다.
먼저 들림 받는 첫 열매와, 환난 속에서 순교의 향기로 자신을 드리는 남은 자들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한 가지를 말한다. 마지막 때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혈통,
지식, 직분, 경력으로 판단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께 굴복한 사람이다.
좁은 문은 이미 열려 있다.
그 문은 성령이 열어 두신 생명의 문이다.
그러나 그 문은 곧 닫혀질것이고 자기 뜻을 내려놓지 않는 큰 자아는 그 문을 지나갈 수 없다.
좁은 문은 성령께 죽고 성령으로 사는 자만이 통과한다.
예수님이 "엘리야 시대"와 "엘리사 때"라고 구분하여 하신 말씀또한 계시록에 요한은 분명히
다르게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첫번째 여자가 양육 받는 1260일 동안, 두번째 여자가 양육 받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영의 눈이 열린 자들이 그 의미의 차이를 보게된다
하나님이 찾으신 자들처럼, 마지막 때도 하나님은 성령의 사람,
좁은 문을 통과한 자들, 오직 성령으로 낮아진 자들을 찾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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