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한글 시리즈 묵상

6.사사 드보라와 야엘을 숨기신 이유

by GOTOKINGDOM 2026. 10. 15.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하며....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브리서 11:32-40)

 

시스라의 철병거를 대적하는 드보라와 바락의 통솔하는 모습

 

오늘은 네 번째 사사 드보라를 묵상합니다.

묵상 번호는 6편으로 이미 앞에 서론 부분이 올려졌기에 사사 순서와 묵상 순서가

틀린 점 양해드리며 이 묵상은 시리즈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참고하시기 편하도록 서론 부분을 링크 올려놓습니다.

 

https://idea5936.tistory.com/entry/사사시대-역사가-오늘날도-반복된다

 

1.사사시대 역사가 오늘날도 반복된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 오늘부터 사사기를 묵상하려고 합니다.사사기는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육신의 지도자들이 모두

gotokingdom.com

 

https://idea5936.tistory.com/entry/성령과-신부의-사역-오라-Ἔρχου엘쿠

 

2.성령과 신부의 사역 - 오라! (Ἔρχου엘쿠)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Καὶ τὸ Πνεῦμα καὶ ἡ νύμφη λ

gotokingdom.com

 

사실 드보라는 사사 중 유일한 여성 지도자로 많은 묵상들의 반전을 일으키는 

여성 사역자의 주인공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저 또한 여성 지도자를 부각하는 묵상 내용으로 글을 올린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묵상이 또 다른 방향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묵상 결과 세상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고 있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남았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우상으로 만든 것 같이 드보라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 드보라를 잔다르크 같은 또 다른 우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전쟁에 부족한 이스라엘은 자신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적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시스라의 철병거들을 보고 용기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드보라가 전장에서 용맹하게 함께 싸운 것이 아니라 전장에서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여

바락에게 그 명령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드보라를 낮추고 다른 모든 묵상을 틀렸다는 의도가 아닙니다.

묵상의 방향이 성령의 의도하심으로 드러내려 하는 것이니 끝까지 집중해서 

함께 묵상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승리의 찬양을 하는 모습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드보라는 바로 위와 같은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고통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찢어 낳은 영적 아들이 바락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스라엘 어미가 되어 영적 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드보라와 바락은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찬송을 올려드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삿5:7)

이스라엘에 지도자가 나서지 않자 드보라가 나서게 되었는데

그녀가 말하기를 자신은 이스라엘 어머니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스스로 세워진 것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세워진 것입니다.

 

드보라가 여성이라 그 시대 못난 남자들을 풍자한 내용으로 묵상도 했지만

드보라가 지도자라는 의미보다 어머니라는 의미를 사용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 또한 이스라엘의 어미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예수님께서도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난 사명이 아니라 친히 여자(영적 정체성)가 되셔서 아들을 낳고

양육하여 보호하시는 표현으로 암닭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오늘 사사 드보라는 위대한 여성 지도자가 아닌 위대한 어머니로 표현될 것입니다.

그것이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후반부에 나타나는 또 다른 한 명의 어머니가 등장하는

여태껏 읽어도 이해되지 않던 부분의 영적 이미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존에 많이 올려진 사사 드보라 묵상글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드보라, 야엘, 바락이 주인공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사사 드보라 시대에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참된 교회의 모습이 되는지 알게 될 것이며

또한 이 모든 등장인물들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옛 자아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이번 묵상에는 이름이나 지명을 원어로 풀었던 기존의 방식이 중요하지만

묵상 글이 길어지니 그 부분을 꼭 필요한 것만 넣겠습니다.

드보라  דְּבוֹרָה (데보라)- 꿀벌 뜻입니다.

꿀벌은 영적으로 달고 오묘한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는 사자(선지자)를 의미합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

꿀벌은 여왕벌을 중심으로 무리를 지어 살고 위험이 닥치면 자신의 목숨을 건

싸움을 합니다.

종려나무(תָּמָר, 타마르)- 대추야자나무 뜻입니다.

아래 תַּחַת(타하트, taḥat)- ... 대신에, ...위하여 의미도 있습니다.

종려나무는 풍성한 열매로 번성과 그 가지가 커지면서 휘어져 겸손의 상징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의인을 의미합니다.

종려나무 아래라고 된 단어는 누군가를 "대신"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 드보라는 정말 여호와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정하신 누군가가 세워지기까지의 "위하여"이기도 합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시92:12)

종려나무 아래 드보라에게 백성들이 재판을 구하는 모습

 

이런 영적 의미들은 아마 그리스도인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드보라의 이름 뜻처럼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여 이스라엘을 바로 잡으려 했습니다.

그것이 한 우두머리 지도자로 선 것이 아니라 자식을 품에 안은 어머니의 희생입니다.

종려나무 아래 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의 재판을 행하며

그녀는 심판을 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처럼 다독거리며 송사를 해결했을 것입니다.

그녀가 사사로서 행한 일이 기록된 것은 백성들을 재판한 것과 바락을 세워 

군사를 일으키라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 것과 여인이(야엘)을 영광 얻는다는 것,

그리고 바락과 함께 다볼산에 올라 여호와께서 출전하라 하신다는 말씀을 

바락에게 대언한 것이 다입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군사를 일으켜 기손강으로 가라 했을 때 바락이 드보라가 함께 

동행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하자 드보라는 함께 가겠다고 하지만

그 가는 일에 영광은 바락이 얻지 못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여자 치마 붙들고 두려워하는 못난 남자 바락으로 치부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묵상글을 올렸고 또 틀렸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것은 한 부분일 뿐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누구나가 그런 상황에서

두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군은 철병거 900승을 거느린 군대 장관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군사 무기하나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질 것이 뻔한 싸움에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좀 반전을 보았습니다.

바락이 두려움에 빠진 못난 남자였다면 이번 길에 영광을 받지 못할 전쟁에

나서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목숨 걸고 나간 전쟁에서 영광도 얻지 못하는 싸움을 왜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바락은 마음 변하지 않고 드보라가 명한대로 이스라엘 군을 모집했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바락이 드보라가 함께 가기를 청한 것은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사자가 드보라(꿀벌)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두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팔을 내리면 진 것과 같이 바락이 드보라를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전쟁에 영광을 얻지 못하더라도 승리할 것을 믿고 싸움에 임한 것입니다.

그것이 맞는 것이 바락이 일만 명을 거느리고 출전하는 명령을 드보라가 대언합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삿4:14)

드보라는 영적 귀와 눈이 다 열려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행하심을 보기도 하여 바락에게 그것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락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지만 여호와의 사자로 세우신 드보라가

전해주는 그것을 믿음으로 바락은 전쟁에 임하였고 승리함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바락은 히브리서 믿음장에 증인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여인에게 영광을 빼앗긴 못난 남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승리한 증인으로

드보라, 야엘도 아닌 바락이 당당히 히브리서에 기록이 된 이유입니다.

또한 드보라와 야엘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녀들이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낳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않도록 부연설명을 하자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아들을 낳는 것

해산의 수고를 하는 여인이 곧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해산을 하였고 우리 또한 해산을 해야 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먼저 자신의 옛 자아(죄성)을 해산해야 합니다.

나는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점점 채워지게 되면 이후로는 

종려나무 같이 열매를 맺는 또 다른 영적 아들을 얻기 위한 해산의 수고를 하게됩니다.

 

세례 요한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세례 요한은 자신은 사라지고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

세례 요한은 자신이 받은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주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것이며 죄를 회개하는 물세례를 주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에 비하여 이적이나 징조를 나타내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여자인 교회와 해산의 고통으로 낳은 아들의 역할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며 자신을 낮추는 자를 주님께서 크다고 높이십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드보라와 야엘이 교회를 나타낸다고 했으니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자신들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좀 더 영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연합되어 흡수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영광이 곧 교회의 영광이 되는 것이지 교회가 영광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그래서 바락 조차도 적장을 죽여 영광의 자리에 앉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럼 야엘은 오늘날 어떤 존재의 의미일까요?

헤벨 חֶבֶר - 동무, 연합, 결합

야엘 יָעֵל - 산염소, 야생염소

야엘의 남편 헤벨은 연합이라는 뜻인데 그는 모세의 장인 자손으로 겐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연합을 하솔 왕 야빈과 화평을 맺었습니다.

"하솔 왕 야빈은 겐 사람 헤벨의 집과 화평이 있음이라."(삿 4:17)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믿음으로 연합되지 못한 모습을 말합니다.

가정마다 불신자들도 있고 신자라고 하지만 항상 그리스도의 몸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세상과 연합하여 안정과 평안을 추구하는 육신적인 신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하여 야엘은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 염소입니다.

염소는 주로 속죄재물로 사용되지만 야생 염소는 주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손에 잡히게 되면 희생 재물이 되어 많은 죄가 전가됩니다.

야엘이 하나님 손에 붙들려 적장의 머리를 박아 버렸습니다.

믿음은 성령이 임하시면 한순간에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야엘의 이름뜻처럼 길들려 지지 않고 주인이 없이 제 마음대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이 붙드시면 한 순간에 변하여 새롭게 됩니다.

물론 보편적인 믿음은 듣고 순종하므로 점점 견고해지지만 사사기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등장하는 사사들의 모습도 그렇고 이스라엘 자체에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다"는 결말의 말씀과도 같이 

모두 야엘 즉 들염소 같은 존재들이라고 풍자화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옛 자아"라는 것이지요.

 

제일 위에 올려진 본문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내용입니다.

구약의 선진들은 모두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약속을 받지 못했다 하였을까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일까요? 

저는 이 질문을 풀려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이 무엇인지, 여기서 말하는 약속이 무엇인지, 

그리고 40절의 ‘온전함’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사 중에서도 4명만 기록이 되었는데 그들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에도

온전함을 이루지 못했다 하니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일까요?

 

그들은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았습니다. 

아직 손에 쥐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칭찬하는 믿음은 약속이 눈앞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믿는 믿음이 아니라,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핵심은 단순히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 약속에 따라 현재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이 땅에서 성공하고, 병이 낫고,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보면 어떤 사람은 심한 고난 가운데에도 믿음으로 살아남았고, 

어떤 사람은 악형을 구차히 피하지 않고 믿음 때문에 죽음까지 감당했습니다.

그들이 광야, 산중, 암혈, 토굴에서 유리하며 도망 다녔습니다.

 

그들의 믿음으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은 달랐지만 그런데도  모두가 믿음의 증인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1장의 궁극적인 믿음은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결과가 아직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끝까지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신 구원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구원의 완성, 곧 부활과 영원한 기업은 아직도

여전히 모든 성도가 함께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더 좋은 것’은 믿음과 경쟁하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믿음으로 바라보던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성취되는 것이

성령으로 증거를 받아 삶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으로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온전함을 이루다’에 헬라어는 τελειόω(텔레이오오)입니다. 

문맥에 따라 완성하다, 목표에 이르게 하다, 온전하게 하다는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씀들을 연결하면, 사람이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완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성도들의 삶에서 성령께서 완성하신다로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11:40의 “우리가 아니면”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성도들이 서로 분리되어 

각자 따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구원 계획 안에서 함께 완성에 이른다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약속을 바라보았고, 신약의 성도들은 그 약속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성도들보다 인간적으로 더 훌륭하거나 믿음이 더 강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이쯤 해서 시스라의 어머니가 왜 결말이 등장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성령으로 함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성경에 여자로 예표 되었다 말씀드렸듯이 사사기에는 2명의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드보라는 영적 아들인 바락과 함께 여호와를 높이며 찬양을 합니다.

믿음으로 행한 모든 일에는 여호와께서 싸우심으로 그 증거를 보이십니다.

시스라 군대와의 싸움은 하늘 군대가 임하여 승리한 것입니다.

그것을 드보다도 바락도 이스라엘 군대도 모두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시스라 어머니는 육신에 속한 사람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역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이끌고 간 철병거가 힘이고 그들이 얻은 노략물이 열매이며

강제로 취한 처녀들이 신부들이며 수놓은 채색옷이 영광의 신분이었습니다.

시스라 또한 자신의 어머니께는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구한 자들입니다.

사사기 등장인물들이 모두 우리 안에 있는 옛 자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비록 적군이요 적군의 어머니이지만 영적으로는 

이들 모두가 우리 안에 있는 부분들의 모습입니다.

 

여자가 교회라고 했으니 즉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성령으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어떤 소속에 있든지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면서

자신의 사역으로 영광을 두르고 다니는 자들이 있습니다.

영광과 열매와 신부 단장은 오직 성령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주님과의 사랑 관계로 이루어진 연합"이 아니면 그 어떤 큰 사역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모른다 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 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요7:22-23)

 

주님은 우리를 선지자, 귀신 쫓음, 권능 행함으로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사랑의 관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선지자 노릇, 귀신 쫓음, 권능 행함 등은 거짓 선지자들과 악인들에게도 주셔서

사용하셨습니다.

대표적 인물이 발람과 바락 그리고 사무엘을 사울 왕 앞에 드러낸 점술 여인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업적과 사역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난 자의 삶을 사는 하나님 사랑하시는 자녀를 보십니다.

그러니 시스라 어머니가 기대했던 것이 바로 "주여 주의 이름으로 사역했습니다" 라는

자랑거리를 기다닌 것입니다.

 

시스라의 어머니가 기대하는 것은 아들의 영광과 승리의 전리품인 사역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스라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오늘날 교회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

교회는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의 영광과 세속적인 승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시스라의 어머니는 아들의 승리를 확신했지만, 그 기대는 현실과 달랐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주님의 이름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사람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사랑 없이 불법을 행하며 교회 영광과 사역만을

드러내고 있지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사사기 본문 자체가 시스라의 어머니를 오늘날 교회의 직접적인 예표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본문을 통해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을 성찰하는 영적 적용입니다.

또한 내 안에 모든 등장인물들이 다 있다고 하였으니 내가 시스라 어머니처럼

마음 안에 사욕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사역의 열매를 하나님의 은혜보다 사람의 능력으로 자랑하지 않는가?

영적 자녀를 자신의 명성과 영향력을 위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세우고 있는가?

고린도후서 4:5는이 원칙을 잘 보여 줍니다.

참된 사역자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 성도를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고 성도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드보라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아들의영광스러운귀환을 기다렸습니다.

두 인물을 오늘날 교회를 돌아보는 거울로 삼으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드보라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깨우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어머니인가, 

아니면 시스라의 어머니처럼 사람의 영광과 사역의 열매를 기다리는 어머니인가?

교회가 낳아야 할 영적 자녀는 특정 지도자를 높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며 그리스도의 다시 오시는 그날에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드보라가 이스라엘 방백들이 즐거이 헌신함을 보고 그들을 사모한다는 표현으로

기쁨을 나타내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볼 때 스스로 부모님을 돕고 형제를 도울 때 참으로 기특하여

흐뭇하게 행복해지듯이 드보라의 마음이 그러했을 거라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드보라는 숨겨지고 히브리서에 영적 아들의 이름 바락만이

믿음의 전당에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영광 안에 흡수된 자들이 믿음으로 장차 올날을 바라보았지만

아직도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교회가 기다리는 분은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게 올바르게 세워진 교회가 바라는 소망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 아니겠습니까?

 

교회의 사명은 사람을 높여 그들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맞을 수 있도록

준비하여 깨어 있는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