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훗이 장이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우편 다리 옷 속에 차고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심히 비둔한 자이었더라
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가로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고하려 하나이다
왕이 명하여 종용케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에훗이 왕의 앞으로 나아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가로되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 좌석에서 일어나니 에훗이 왼손으로 우편 다리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 몸에서 빼어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더라
사사기3:16-22

오늘은 두 번째 사사 에훗입니다.
몇일을 계속 에훗을 묵상하다 보니 나의 연약함과 나의 의가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묵상을 마칠 때 이런 부끄러움 자체도 나의 나됨이 주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뭔가 좀 더 나은 내 모습이 되고픈 죄성에서 오는 양상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나의 어떠한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닌 주님께서 어떠한 모습의 나이든 사랑하시기에
또 그런 나를 창조하신 주인 되시고 나의 왕 되심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또 한 번 마음에 새겼습니다.
사사기 전체 내용이 이렇게 저와 같이 반복되이 악을 행하는 모습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또" 혹은 "다시"를 반복하여 이스라엘의 악을 행함을 징계하시고 채찍 하심으로
양육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참고로 이 묵상은 1편부터 시리즈로 계속 진행 중이니 앞편부터 묵상하시면 됩니다.
웃니엘이 사사가 되어 여호와께서 40년의 태평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웃니엘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또 여호와 목전에서 악을 행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삿 3:12)
"또" 혹은 "다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וַיֹּסִפוּ(바요시푸)입니다
원형은 יסף (야사프)- 더하다, 증가하다 뜻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또 악을 행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전에 했던 악에서 돌이키지 않고 "다시 악을 더했다"는 흐름입니다.
이번에는 여호와께서 모압왕 에글론을 18년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전 구산 리사다임을 섬길 때보다 훨씬 더 긴 세월입니다.
모압왕 에글론은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과 연합하여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하였습니다.
종려나무 성읍은 여호와의 권능으로 승리를 이끈 여리고성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친히 전쟁하신 여리고성을 다시 적의 손에 넘기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볼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악을 행할 줄을 이미 다 아시고
이 모든 상황들을 여호와께서 허락하시며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행하도록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죄를 행하기에
다시 돌이키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압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사...(삿3:12)

에글론 히브리어는 עֶגְלוֹן입니다
어근이 동일한 עֵגֶל (에겔)- 송아지, 어린 소 뜻입니다.
그 이름은 송아지 곧 어린 소인데 말씀에 에글론은 "심히 비둔한 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치는 공물에 튼실하게 살이 찐 송아지가 된 것이지요.
에글론은 모압 왕이며 암몬과 아말렉 또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데 합류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 조상인 "데라"즉 아브라함의 아버지 자손들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데라의 아들 하란 그리고 하란의 아들 "롯과 두 딸들에게서 나온 자손"입니다.
아말렉은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그리고 이삭의 아들 "에서 자손"입니다.
하나님은 롯과 두 딸이 인륜을 범하는 죄를 지을 때 그냥 두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천하에서 멸절하시겠다던 아말렉도 남겨 두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벌하지 못하심이 아니요
모두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막대기와 가시로 사용하시려고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광야 여정동안 모압왕 발락이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지만
여호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므로 모압왕 발락 통치 때는 후퇴하였습니다.
그렇게 힘없는 존재였던 모압왕을 이번에 에글론 통치때는 여호와께서 강성케 하셨습니다.
신명기 2장 전체를 참고하여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광야 38년 동안 1세대 모든 군인이 다 사망했습니다.
광야 길을 지나는 동안 여호와께서 에서 자손들을 괴롭게 말라하시고
그 땅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셨다 하셨습니다.
모압과 암몬 자손도 괴롭게 말라 그 땅을 롯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셨다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그곳을 통과할 때 필요한 것을 그들에게 돈을 주고 사라 하셨으나
에서, 모압, 암몬 자손들 모두 자기 땅을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험한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에서, 모압, 암몬 자손들이 행한 일을 기뻐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땅을 통과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셨다면 처음부터 그 길로 행하지 못하게 하셨겠지요.
그들이 이스라엘이 통과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해서 벌하시지도 기뻐하시지도 않으신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 되심입니다.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헤스본과 바산을 지날 때는 다른 결과를 얻었습니다.
모든 것이 에서, 모압, 암몬과 동일한 조건과 요구였으나 단 한 가지 다른 이유는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는 여호와의 언약관계에 없기 때문입니다.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의 통과하기를 허락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게 하셨음이라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2:30)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산 왕 옥과 그 모든 백성을 우리 손에 붙이시매
우리가 그들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느니라."(신 3:3)

그리고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헤스본은 원래 모압 땅이었는데 빼앗긴 것이고
바산은 암몬 땅이 아닙니다.
그러니 헤스본과 바산을 점령하여도 여호와의 언약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모압과 암몬의 땅은 조금도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헤스본은 아모리 왕 시혼의 성읍이라 그가 모압의 전 왕과 싸워
그의 모든 땅을 아르논까지빼앗았더라”(민 21:26)
이 땅을 이스라엘이 점령을 하고 언약의 땅에서 요단 동편으로 불렀습니다.
이후에 요단 동편땅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역사의 전반기 흐름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악을 벌하시기 위해 모압 왕 에글론을 18년 동안 사용하셨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또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마치 기다리신 것 같이 구원자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에훗을 세우십니다.
베냐민 사람 (אִישׁ יְמִינִי, 이쉬 이 미니)'오른손의 사람' 또는 ', '남쪽 사람'이라는 뜻
게라(גֵּרָא) 원어 뜻으로는 '거류민', '나그네'라는 어근에서 유래했습니다.
에훗 (אֵהוּד, 에후드)이름의 원어 뜻은 '일치', '연합', '통일'입니다.
왼손잡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는 좀 다릅니다.
אִטֵּר (잇테르)는 닫힌, 묶인,제한된 의미입니다.
왼손잡이는 오른손과 별계로 왼손이 더 편하게 사용됨을 말하지만
אִטֵּר (잇테르)는 오른손이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왼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오른손이 불구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이 성경 언어의 묘미입니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아들이 세워집니다.
여호와께서 베냐민 지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는 에훗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이 그의 손으로 모압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게 하셨습니다.
에훗이 한 규빗이나 되는 좌우에 날 선 검을 우편 다리에 숨기고도 왕 앞에 갈 수 있던 것이
오른손이 불구였기에 경계가 느쓴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훗이 "은밀한 일을 왕에게 고하려 한다"는 말에도 주위 경호원들을
물러가라 하니 모두 밖으로 나갔습니다.
에글론 왕은 "저 불구자가 내게 무엇을 하겠어?"
"불구자쯤이야 내가 제압할 수 있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훗이 에글론 앞에 서게 된 것은 그의 능력이나 힘이 아니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앞으로 사사들이 등장할 때마다 느끼게 되겠지만 사사기 모든 내용들이
인간의 죄성과 더러운 의만 발견되고 그러므로 한 의로운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부르짖는 삶이 곧 신부들의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하시기 위해 낮고 연약한 모습으로 초림 예수님께서
오셨고 이제 곧 만왕의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신부를 맞으려 오실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한 가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먼저 볼 것은 말씀 안에 “은닉성(隱匿性)”-쉽게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성질
에훗이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우상을 섬기던 악에서 돌이킴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놓았습니다.
"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삿3:19)
길갈 הַגִּלְגָּל(하길갈)- 바퀴라는 뜻으로 요단을 건너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 지킨 곳
돌 뜨는 곳 הַפְּסִילִים(하프실림)- 기본 단어는 פֶּסֶל(페실) 조각한 것들, 새긴 것들, 우상들
페실은 새겨 만든 우상, 조각한 형상을 뜻합니다.
~에서부터 מִן(민)- 어떤 장소나 시점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을 나타냅니다.
돌아오다 שָׁב(슈브)- 돌이키다, 회복되다 뜻입니다.
직역하면 "그 길갈에 근처 그 새겨 만든 우상들에서 돌이켰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악을 더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은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된 에훗이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섬기던 우상의 나라에
곡물을 바쳤습니다.
에훗이 이번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그 악에서 돌이켰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악을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감추어 두셨습니다.
길갈에 전관사 하를 붙여 "그 길갈" 즉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하고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곳입니다.
요단을 건너고 기념하라 하시며 요단 제사장이 선 곳의 12돌을 가져와
길갈에 12지파가 진영에 세웠습니다.
그 돌들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갈 근처에서 그 우상을 새겨 만드는 곳이 되었습니다.
전관사 "하"가 붙은 "그 우상"은 모압의 압제 아래 있었으니 모압의 대표 신
그모스와 아스다롯 등입니다.
“모압의 신 그모스의 백성이 망하였도다”(민 21:29)
그모스와 암몬의 신 몰렉(말곰)이 인신제사를 하는 비슷한 모습이지만
그모스는 돌과 진흙으로 만든 것 같고 몰렉(말곰)은 철로 만든 거 같습니다.
이에 대한 견해는 나중에 암몬 족속이 등장하는 사사 입다 시간에 자세히 나누겠습니다.


그모스(Chemosh)와 아스다롯(Ashtoreth)을 짧게 설명하자면 모압의 주신은 그모스입니다.
가나안 본토와 페니키아 지역의 정통 신화에서 아스다롯(아스타르테)은
폭풍의 신 바알(Baal)의 여동생이자 아내(배우자)입니다.
두 신은 각각 '하늘의 비(남신)'와 '대지의 생산력(여신)'을 상징하며 가나안의 풍요와
종교의 핵심 커플로 숭배되었습니다.
성경에서도 주로 "바알과 아스다롯"을 세트로 묶어서 책망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모스: '정복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전쟁과 태양의 신으로, 국가의 승리와
강력한 힘(남성성)을 상징합니다.
위기 상황에는 인신제사(어린 자녀를 불태워 바침)를 요구할 만큼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을 가졌습니다.
위에 그림에서 황소의 가슴 쪽에 여러 구멍 위로 석판이 열려있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어린 자녀를 석판 위에 올려놓아 죽기까지 지켜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한 나라가 힘이 세지거나 다른 문화와 교류할 때,
이웃 나라의 강력한 신을 수입해 오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모스는 전쟁과 태양의 신(남신)이었기에, 나라의 번영을 위해서는
풍요와 출산을 담당할 강력한 여신(파트너)이 필요했습니다.
모압 인들은 당시 근동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여신이었던
가나안의 아스다롯을 수입하여 자신들의 주신인 그모스의 아내로 짝지어 준 것입니다.
(그 흔적이 메사 석비의 '아스다르-그모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대인들이 이 두 신을 짝지어 섬긴 이유는 풍요와 생존을 극대화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종교적으로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별 다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속히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긴 것은 모두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신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가요?
어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우리의 바람을 가지고 기도 자리에 있을 때
그것이 어쩔 때는 협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이번만 해결해 주시면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주님 만약 1억을 주신다면 반드시 십일조와 구제헌금으로 천만 원 내겠습니다"
"주님 제 병을 치료해 주시면 앞으로 남은 삶은 주님의 일 하겠습니다" 등등...
이런 조건부의 기도는 실상 우상에게 제사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정죄하려는 말은 아닙니다.
저도 동일하게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상한 심령으로 낮아질 수 있는 것이며 참 회개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잠깐 상한 심령의 주인공 다윗의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시편 51을 보면 이런 황당한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저는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 다윗이 밧세바를 겁탈하고 또 임신한 사실을
간계를 부려 우리아의 자식이라 속이려 했고 그도 안 되니
전쟁 중인 암몬 사람의 손에 죽도록 계략을 세웠습니다.
죽은 남편으로 인해 호곡하는 밧세바를 장사를 마치자 바로 궁으로 데려와
아내로 삼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
그렇게 악한 죄를 범하였음에도 다윗의 고백이 여호와께만 범죄 하였다니,
그럼 억울하게 죽은 우리아와 밧세바에게는 죄책감이 없다는 것인지
물론 왕의 권위에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해도 성경에 이렇게 기록된 것이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로써 맞는 소리인지 답답했습니다.
그러다 시편 32:3-4에 이 말씀을 찾았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다윗이 죄를 범한 후에 죄책감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인 괴로움과 밧세바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습니다.
왕이라서 자신의 죄를 사람에게 잘못했다 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지도자로 자신이 잘해 왔고 왕 다운 배려와 위상도 있었습니다.
사울 왕과의 관계도 나발과의 관계도 자신을 저주하는 시므이의 관계도
자신을 왕궁에서 쫓아낸 역적 아들 압살롬의 관계에도 수많은 의인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일어났던 밧세바와 우리아 사건이었습니다.
이번 한 번인데.... 하고 깊은 회개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우연이 아닙니다.
다윗이 왕 다 울 때 그의 감추어진 모습을 성령께서 다스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열심히 헌신하고 충성하며 스스로 남들보다 나은 모습처럼 보일 때
그때가 성령님이 시험하실 때입니다.
우리가 점점 성화되어 간다고 말을 하지만 실상은 우리의 연약함을
성령께서 지키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 높아지면 성령께서 우리를 양육하시기 위해 시험하십니다.
다윗에게도 성령께서 시험하셨습니다.
밧세바에게서 나은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에도 다윗은 참 회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기록된 말씀을 보아 알 수 있는데 대부분 설교자들이 다윗의 간절한 기도와
믿음으로 연결하여 묵상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다윗이 참 회개를 못했구나"로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있느냐"(삼하12:22-23)
금식하고 운 것의 조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세상 다른 신들을 섬길 때처럼 식음을 전폐하고 울며 빌 때
불쌍히 여김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자 바로 금식과 기도를 멈춥니다.
아이가 죽었으니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죽은 아이를 다시 돌려받은 말씀도 여러 번 있습니다.
다윗의 그 내면에 숨겨진 인간의 욕망을 성령께서 비추어 드러내신 것입니다.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얻고자 했으나 그 마음의 뜻과 생각을 다 감찰하시는
성령님은 그런 다윗의 마음을 상한 심령까지 낮추십니다.
그것이 시편 51편의 노래로 잘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다."
위에 시편을 원어로 다시 직역을 하면 이런 다윗의 고백입니다.
"당신께, 오직 당신께만 내가 죄를 지었고, 당신의 눈앞에서 그 악을 내가 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고, 당신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결(무죄)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가 여호와 목전에 행하였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죄를 범할 때 주께서 보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시도록 주께서 함께하신다면 범행 현장에서 어떻게 주의 얼굴을 뵙겠습니까?
아마도 베드로가 그 끔찍한 애통한 심령을 잘 알 거 같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욕할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정말 본인 스스로도 그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심령으로 낮아졌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 의로우심과 심판하실 때 깨끗하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자신의 노력과 열심에 상관없이 주님의 공의와 깨끗한 심판이심을
성령으로 깨달아 영적인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묵상이 길어졌는데...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악에서 돌이킨 에훗이 대적에게 들어갑니다.
에훗이 왕의 앞으로 나아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가로되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 좌석에서 일어나니 (삿3:20)
분별해야 되는 부분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여기서 에훗이 말하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압 왕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전한다 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18년 동안
공물을 거두어 호의호식으로 살찌워 비둔하기까지 한 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모든 신 "엘로힘"을 뜻합니다.
비둔한 왕 에글론이 신의 존재 앞에 예를 표하느라 자리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의가 종교심에서 왔다는 것이 밝히 보이는 장면입니다.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 몸에서 빼어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더라.(삿3:22)
한글 성경에는 번역이 빠진 부분이 원어에 있습니다.
기름이 칼날에 엉겼고 뒤에 이 부분이 더 있습니다.
וַיֵּצֵא הַפַּרְשְׁדֹנָה
와예체 하파르쉐도나
번역하면 "그리고 더러운 것이 나왔다","그리고 배설물이 나왔다"입니다.
פַּרְשְׁדֹנָה (파르쉐도나)단어는 희귀어로 이곳 한 번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번역자들의 다양한 견해로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령으로 깨달은 묵상으로 나누겠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발을 가리다"는 표현은 용변을 보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이 사무엘상24:3 사울 왕이 굴 안에 발을 가리러 들어갔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용변 보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진 않습니다.
사실 사울이 굴 안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데 다윗이 와서 겉옷자락을
사울이 모르게 잘랐다는 것이 이해가 되진 않습니다.
오히려 "가리다" 히브리어가 מְסִיךְ(메시크)- 어근은 סָכַךְ(사카크) 덮다, 막다, 감싸다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 총 22회 나오는데 모두 속죄소 덮음, 그룹 날개로 덮음, 여호와의 보호하심
그리고 대적을 격동하심에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나타내는 덮음과 완전 대조적인 대적을 격동하심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깊이 묵상 끝에 이 모든 의미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덮임을 받는 존재도 죄성을 가진 우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격동시키시는 대적 또안 죄성을 가진 우리입니다.
그것이 신약에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우리를 책망하시므로
보호하시는 것이지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음이 에덴에서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어 들어왔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죄를 짓고 있음에도 죽지 않았습니다.
물론 첫 사람 아담도 바로 죽지 않고 930세를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님이 보호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무조건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의 아비 마귀에게 다시 빼앗기지 않기 위해 훈계하시고 책망하시며
말씀의 검으로 우리 숨은 생각과 뜻까지 관찰하시며 찔러 쪼개십니다.
그래서 참 회개에 이르게 되면 마음이 찢겨서 정말 많이 아픕니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아는 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묵상 내용과 에글론이 발을 가린다는 것이 어떻게 연결이 될까요?
에훗이 감추고 간 양날선 검은 히브리서 말씀처럼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의 검이 대적 곧 대적은 우리의 죄성이라고 위에 말씀드렸습니다.
"죄"는 히브리어 חָטָא(하타)- 죄를 짓다, 빗나가다
헬라어 ἁμαρτία(하마르티아)- 빗나가다, 과녁을 빗나가다
죄의 뜻이 히브리어도 헬라어도 "빗나가다"입니다.
무엇에 빗나갔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빗나간 것입니다.
그럼 바로 잡으려면 빗나가지 않고 관통해야 됩니다.
그것이 말씀의 검 곧 성령의 검입니다.
찔러 쪼개시고 도려내시는 성령님의 검에 나 자신을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에글론은 세상에 빠져서 비둔해진 우리의 거룩을 잃은 죄의 모습입니다.
에훗이 에글론이 경계할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고 돌격하여
칼끝이 등뒤까지 제대로 관통했습니다.
성령님도 우리가 세상에 빠져 있을 때 생각지도 않았는데 불쑥불쑥
마음의 찔림을 주십니다.
어쩔 때는 내가 의롭다고 생각될 때 그 마음에 계산적인 사악함을 들추어 보이십니다.
또 내가 억울하다 생각될때 내 마음에 유익을 기대했으나 결과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에글론의 등뒤까지 관통한 칼처럼 우리 마음에서 성령의 검이
제대로 관통된 것입니다.
그래야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때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에글론을 관통한 칼 날에 기름이 엉겼다는 표현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잊지 마세요. 먼저 말씀드렸던 것 같이 에훗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이
숨겨진 것이라 했습니다.
성령님의 검이 우리에게 찔러 쪼개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인 것입니다.
그럼 발을 가리신다는 의미가 우리의 죄성(에글론)을 덮었다는 표현이
이해가 되셨습니까?
그럼 한글 성경에는 빠져 있는 부분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וַיֵּצֵא הַפַּרְשְׁדֹנָה
와예체 하파르쉐도나
번역하면 "그리고 더러운 것이 나왔다","그리고 배설물이 나왔다"입니다.
죄는 더러운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랑 바리새인의 의를 배설물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검이 관통하게 되면 우리의 의는 더러운 배설물로 버려집니다.
에글론이 서늘한 다락방에 있었다는 건 더운 여름에 바람이 잘 들도록
창이 나있는 위층 높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다락방이라 했으니 넓은 방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신하들이 다락방 문을 확인했을 때 잠겨 있었으나
"왕이 필연 다락방에서 발을 가리우신다"했던것은 더운 여름 날씨에
좁은 다락방에서 배설물을 쏟아 냈으니 냄새가 밖에까지 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곡물을 바치러 왔으니 추수를 해야 양식과 가축과 귀한 예물을
바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령의 검이 예표로 등장하니 오순절이 떠오르며
여름 절기라는 것에서 분명 배설물 냄새가 났으니 왕이 용변을 보시는 것이 분명하다
신하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없는 내용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추론일 뿐입니다.
동의와 신뢰하지 않으셔도 되는 부분입니다.
그럼 성경에 있는 부분을 연결해 볼까요?
"만일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이 범죄 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
그 범죄 한 죄를 인하여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수송아지를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머리에 안수하고....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똥 곧 송아지의 전체를 진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사를찌니라.(레4:3-12)
전체 내용이 길어 중간에 절충했지만 4장 전체를 읽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먼저 속죄의 제물이 수 송아지입니다.
기억하시나요?
에글론 이름의 뜻이 송아지라고 원어로 찾아보았습니다.
에글론 히브리어는 עֶגְלוֹן입니다
어근이 동일한 עֵגֶל (에겔)- 송아지, 어린 소 뜻입니다
속죄 제물 수송아지가 에글론으로 예표되었습니다.
그런데 위 말씀에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의 범죄"를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것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럼 레위기 4장 말씀은
우리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되겠습니까?(마음으로 대답하세요)
속죄 제물의 수송아지의 피는 번제단 밑에 쏟아내고
기름은 모두 화목제 희생 제물을 취함과 같이 취하여 번제단 위에 불사르고
가죽, 고기, 머리, 다리, 내장 그리고 똥을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가서 나무 위에 불로 모두 태웁니다.
원어로 보면 흥미로운 단어가 몇 개 있습니다.
재 דֶּשֶׁן(데쉔)- 살찜, 기름짐, 기름기 많은 재, 풍성한
버리는 곳 שֶׁפֶךְ(세페크)- 붓다, 쏟다, 흘리다
정결한 곳 מְקוֹם טָהוֹר(메콤 타호르)- 깨끗하게 서있는 자리
“그 기름진 재를 쏟아 버리고 깨끗하게 서는 곳”이 됩니다.
무슨 뜻일까요?
에글론이 엉긴 기름과 더러운 배설물을 쏟았습니다.
우리의 죄악과 누더기 같은 종교성 안에서의 의로움은 사도 바울과 같이
배설물로 무두 쏟아 버리는 곳 그곳이 영문(진영) 밖입니다.
그 후에 정결하게 곧 깨끗하게 되어 다시 굳게 서는 곳이 배설물과 연결됩니다.
배설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추구하던 육신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입니다.
살찌우고, 기름기고, 풍성하게 이 땅에서의 삶을 바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자들에게 공물을 거두어 호의호식으로 비둔해진 에글론 같이
우리 또한 연약한 내 지체를 사용하여 열심으로 거두어 모아서
이 세상에서 살찌고 기름진 삶으로 "내 영혼아 평안하라" 하며
서늘한 다락방에 앉아 안주하며 지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이제 끝으로 에훗이 다시 돌 뜨는 곳을 지나 즉 우상을 보지 않고
"스이라" שְׂעִירָה(세이라)- 털이 많은 뜻을 가진 곳으로 도망갑니다.
그런데 "스이라"는 지명이라고 하기에는 성경에 단 한 번만 등장합니다.
어원이 동일한 שֵׂעִיר(세아르)를 찾아보면 피부병의 형상을 털을 보고 구분하는
용례에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발견이 나실인의 머리털에 관해서도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에훗이 털이 많은 곳으로 도망갔다는 의미는
나실인들이 사는 곳으로 도망갔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에훗은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 대적 모압 사람을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요단강 나루에서 모압 사람 일만 명가량을 죽이고 승리합니다.
여호와께서 80년 동안 태평함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정말 대단하시고 또 흥미로우십니다.
어떻게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파괴하시면서 다시 정결하게 세우심이
그 지혜가 무궁하시고 계략이 수를 알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그 지혜와 긍휼 하심에 감격이 되어 울컥하고
진정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이번 에훗을 묵상하며 20절 밖에 안 되는 부분이라 금방 끝이 날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과 대화를 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성경 말씀이
너무도 신기하게 연결이 되어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성령님의 가르침 속에서 저는 너무도 행복하고 기쁜데
깊은 묵상을 글로 다 표현을 할 수 없어 찾아주시는 성도님들께 죄송하기도 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느끼며 충만한 기름 부음이 함께 전파되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로 간구합니다.
사실 짧은 에필로그를 올리려고 했지만 묵상이 너무 길어 다음에
올려야겠습니다.
그럼 다음 편 사사 삼갈입니다.
단 한절뿐인데 성령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주실지 저도 기대됩니다.
샬롬~
'🇰🇷 한글 시리즈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3.사사 옷니엘 시대는 세상을 넘어서는 싸움 (3) | 2026.09.21 |
|---|---|
| 2.성령과 신부의 사역 - 오라! (Ἔρχου엘쿠) (1) | 2026.09.12 |
| 1.사사시대 역사가 오늘날도 반복된다 (1) | 2026.09.07 |
| 4.선지자에게 있는 은밀한 죄(에필로그) (0) | 2026.08.10 |
| 3.선지자에게 있는 은밀한 죄 (0) | 2026.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