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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시리즈 묵상

5.사사 삼갈을 통해 성령님이 드신 소모는 막대기

by GOTOKINGDOM 2026. 10. 4.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사사기3:31)

삼갈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과 싸움

 

오늘은 3번째 사사 삼갈을 묵상합니다.

사사기 3장 31절에는 삼갈이라는 사람이 한 절에 아주 짧게 등장합니다.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사사 삼갈에 관한 기록은 놀라울 정도로 짧습니다.

그러나 감추어진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다른 사사들에게는 압제의 기간과 구원의 과정과 태평한 기간이 기록되어 있는데

삼갈에게는 그러한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가 어느 지파 출신인지도 알 수 없고 몇 년 동안 사사로 있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는지도 그의 죽음에 관한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단 한 가지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느것은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입니다.

 

사사 삼갈이라는 사람을 묵상하기 위해 성령님께 많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성경기록으로는 다 알수 없었기에 여러 역사 책도 참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록에 없는 인물이라 지극히 개인적인 영감을 통해 주시는 

성령님을 의지할수 밖에 없었고 개인적인 추론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묵상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단 한절 기록에 얼마나 풍성한 묵상이

이루어 지는지 저도 많이 놀랬습니다.

성경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름이 얼마나 알려졌는지 유명한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에 합당한지를 보십니다.

그리고 사사 삼갈 같이 이름만 덩그러니 있는 인물도 성경 기록에 있다는 것에

하나님의 사람 보시는 눈설미에 놀라지 않을수 없습니다.

 

성경은 무오한 말씀이 없기에 한 절이라도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찾기위해

성령님과 동행하며 무한정 배움의 가능성과 영적 실체의 체험을 주시기를

갈급한 심령으로 집중 하였습니다.

너무 궁금하고, 알고 싶어 구하고 또 구하여 마침내 보게되는 영적 체험이

꿀송이보다 달게 느껴질 뿐입니다.

저는 단 한절에 기록된 사사 삼갈을 묵상하기도 전에 이미 흥분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지식이 저의 머리에는 백지 상태였기에 성령님께 복종하고

묵상을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실지 기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여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린도후서10:4-6

아멘!

 

우리의 복종이 먼전 온전히 되어야 세상에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벌하신다고 하십니다.

세상에 억압하고 다스리는 악한 세력이 점점 왕성해 지는 오늘날을 보면

주님께 온전히 복종하는 신부들의 준비가 다 되어간다는 표적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위로하십시다.

세상이 더 어둠고 악해질때 주님 얼굴뵙는 날이 곧 입니다.

오늘 본문 사사 삼갈을 통하여 우리를 어떻게 그리스도께 복종시키시는지

곧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훈련하시는지를 알게 되실것입니다.

 

삼갈의 히브리어 שַׁמְגַּר(샴가르)- 칼, 검을 뜻한다고 하지만 어원이 불확실합니다.

아낫 עֲנָת(아나트)- 응답을 뜻하지만 이또한 뜻이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이름이 히브리어 이름이 아닐 가능성을 오래 연구해 왔다고 합니다.

특히 고대 헷족속과 후르리어 계통의 이름들과 비교하여 삼갈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 주변 민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학자들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갈이 이방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의 이름이 일반적인

히브리어 이름과 다르고 그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표현도 매우 특이하며

성경에 같은 이름이 없기 때문에 그가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가문에서

나온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으로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됩니다만 그것에 대한 확신으로 묵상을 치우치지 않겠습니다.

 

삼갈은 아낫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낫이 실제 사람으로 삼갈의 아버지였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족보가 모오하므로 성경 말씀 안에서 연관성을 찾아봅니다.

여호수아19:32-39에는 납달리 자손이 가나안 땅에 제비 뽑은 지역이 나옵니다.

그 중에 "벧 아낫(베트 아나트)- 아낫의 집 곧 아낫 신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벧 세메스(베트 세메쉬)- 태양의 집 곧 태양 신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어서 사사기1:33에서도 벧 아낫과 벧 세메스 거민들을 사역(노동, 역군)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낫의 아들이란 의미가 벧 아낫의 사람이라는 뜻일수 있습니다.

아낫(Anat): 바알의 핵심적인 누이이자 아내입니다.

앞에서는 아스다롯이 바알의 누이이자 아내라고 했는데요

그래서 아낫과 아스다롯을 동일시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어쩜 아스다롯을 모압이 수입을 했다하니 모압식으로 이름을 불렀을 수도 있고

신의 아내가 꼭 한명이라는 것도 이상하니 아내중 한명일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아낫에 대하여는 고대 신화에 자세한 사연들이 전해져 왔습니다.

죽음의 신 '못'이 '바알'을 죽이고 그 시체를 숨겼습니다.

아낫은 남편 '바알'의 시체를 찾아내고 다시 살리는 주역입니다.

분명히 할것은 이들은 그냥 많은 우상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아낫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족보 이상의 의미로 볼수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자격 없는 자 삼갈을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출신도 분명하지 않고 기록도 많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그 사람의 배경이 하나님의 구원을 제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위해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도구를 중요시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삼갈을 묵상할 때 사사기 3장의 순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사기 3장 앞부분에는 오른손이 제한된 에훗이 모압 왕 에글론을 죽였고

모압은 이스라엘의 동쪽, 요단강 건너편에 위치했으며 건너는 나루턱에서

에훗과 이스라엘 자손들은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사사기 3장 30절은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31절에 삼갈이 등장하며 "그도"라는 수식으로 사사가 되었다합니다.

에훗은 동쪽의 모압을 상대하였습니다.

삼갈은 서쪽의 블레셋을 상대하였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삼갈은 에훗과 같은 시대의 서쪽 전선에서

이스라엘을 지킨 사람일 가능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요단을 중심으로 서쪽 끝이 블레셋 동쪽이 모압

 

성경은 삼갈이 에훗 다음에 등장했다고 기록하지만, 삼갈이 반드시

에훗의 사역이 완전히 끝난 뒤 새로운 시대를 시작한 사사였다고 볼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다음 사사 드보라때에 삼갈 이후라고 하지 않고

두번째 사사 "에훗이 죽은 후에..."로 시작됩니다.

삼갈이 이후 어떻게 이스라엘을 이끌었는지는 성경이 함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갈은 한 시대의 특정한 위기 가운데 함께 동력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이고자

하나님께서 화합하는 구원자로 보이셨습니다.

에훗이 동쪽에서 모압의 압제를 무너뜨리는 동안 블레셋이 그 틈을 타서 서쪽에서

위협하고 침략해 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만을 통해 모든 곳을 다스리는 방식이 아니라

각 시대와 각 지역의 필요에 따라 사람을 일으켜 사용하셨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오른손이 제한되어 사용하지 못하는 지체를 왼손으로 사용하시고

오른손이 해야할 일은 또 다른 지체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에훗의 제한된 오른손의 역활을 삼갈이 한것과 같습니다.

사사 에훗과 삼갈의 말씀을 묵상하며 자연적으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세우신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며 은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5-27)

 

그렇다면 블레셋은 왜 등장하게 된것인지 영적 의미를 성경 말씀으로 보겠습니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창10:6)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창10:13-14)

블레셋은 곧 노아의 아들 함의 후손이며 가나안 족속의 형제입니다.

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존재로 등장을 합니다.

 

흉년이 들어 이삭이 블레셋 땅에 거할때 아브라함과 같이 이삭도 아내를

자신 목숨의 위협이 올까하여 블레셋 왕에게 빼앗기는 연약함을 보입니다.

그것이 연약함때문에 끊임없이 타협으로 미혹하는 우리의 악한 이기심을 말합니다.

이삭이 블레셋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 여호와께서 백배의 복을 주셔서 거부가되니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따라 다니며 이삭이 판 우물을 흙으로 덮어버립니다.

이는 순종하는 삶에서 하나님이 복을 주실때 끊임없이 인본주의 신앙으로 

말씀을 덮어버리는것을 의미합니다.

우물은 성경 말씀을 퍼 올리는 수고를 예표하는데 순종하는 이에게 흙은 곧 창조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인본주의 사상을 신실한 영적 그리스도인을 시기하여 계속 곁에서 따라다니며

방해를 하는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부유함을 시기하여 "그만하면 됐어 넌 이미 부자잖아"

하듯이 계속 농사짓고 가축들이 먹을 우물을 막아버림같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성장하며 충만한 자들을 시기하여 "그만하면 됐어 

이젠 사람들을 섬기고 봉사해야지"로 육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영적 시기로 일어나는 열심이라는 종교성을 말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믿음 없이 언약궤를 전장으로 메고가서

어처구니 없이 언약궤를 빼앗기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말씀을 믿지 않고 그 율법적인 행위만으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거할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 말씀으로 세상을 비판하는 오늘날

교회들과 같습니다.

세상에 새로운 성경에 반하는 법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세상 또한 그에 합당한 이유들을 들고 변론합니다.

말세에 이런 현상들이 있을것이라 하셨으니 사람이 막을수 있는것이 아니며

성경 말씀을 들고 그들과 변론을 해도 세상이 다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믿는 백성들도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세상을 비판할수 없습니다.

성경에 반하는 법들을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니엘이 자신을 죽이고자 생긴 법인줄 알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를 멈추지

않은것과 같이 우리의 믿음이 바로 서게되면 하나님께서 일 하실것입니다.

자신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비판하는것은 언약궤를 적을 쫓아내는

부적과 같이 사용한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그것이 내 목적을 이루기위해 의지하게되는 거짓된 믿음인 신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골리앗 같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자신을 대한함을 포장합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헌금, 성경 지식 등으로 누가 보아도 경건한 모습으로 교회에서 

높은 자리에 있지만 그가 거짓의 영으로 거인 골리앗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마음 합한 자라 하신 소년 다윗을 사용하셔서 물멧돌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이는 소년 다윗을 높이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 이스라엘을 묘욕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어떠함으로 교회 형제들을 판단해서는 않됩니다.

비록 이스라엘 군대가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했으나 그 가정과 족속을 위해 

그 전장의 자리에서 도망가지 않고 둘러 서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열심이 없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는 모습이 더 악하다 보십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스스로 높아진 자들의 

우월성에서 오는 교만을 말합니다.

더 많이 풀어볼수 있겠지만 이정도로 블레셋에 대한 영적의미를 줄이겠습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 동편 요단강을 차단하고 승리로 이끈

사사 에훗과 연결하여 사사 삼갈이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오른손의 정체성을 잃은 베냐민 지파의 에훗이 오른손 없이도 승리하게됩니다.

에훗은 자신의 연약한 결함때문에 동족들에게 상처도 많이 받았을것입니다.

대적에게 공물을 대표로 받쳤다는 것은 세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세리는 천대받기도 했지만 동족에게 미움을 받는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런자가 오른손까지 사용하지 못하는 불구입니다.

만약 에훗이 마음에 상처와 쓴뿌리가 이었다면 싸움에 승리를 이루고나서

백성들에게 더 큰 가해자로 다스릴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나는 오른손이 없이 왼손으로도 충분이 승리할수 있다"라고 교만해 지면 

반드시 블레셋이 틈타게 됩니다.

아닙니다. "이 모든 승리는 오른손의 정체성을 잃은 부족한 저를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행하신 것입니다"라고 해야 맞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세워진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인간들은 끝까지 자신의 부족함을 사용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말하면서도

내면에는 자신도 함께 영광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사사기에 숨겨진 내면의 악으로 나타나 현상 중에 있습니다.

"그 때에 성읍들에서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2만6천이요

그 외에 기브아 거민중 택한 자가 7백인데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7백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호리도 틀림이 없는 자더라."(삿20:15-16)

אִטֵּר (잇테르)는 오른손이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는 에훗을 칭하던 동일한 뜻입니다.

성경에 베냐민 지파가 등장하는 단 2번 있는 단어입니다.

기억하시나요? 앞4편에서 나누었던 내용입니다.

원어 성경에는 왼손잡이가 아닌 오른손 사용이 제한된 즉 불구라는 의미입니다.

사사기20장 내용은 레위인의 첩을 간간하고 죽게한 베냐민 지파를 고소하기 위해

레위인이 자신의 첩 시신을 12조각으로 떠서 각 지파에 보내었습니다.

그것을 율법으로 정죄하여 베냐민 지파를 심판하러 모든 지파가 모였을때

베냐민 지파중에 훈련된 왼손잡이 들이 특별히 선별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에 따른 내용을 차츰 순차에 맞게 나누도록하고 오늘은 인간의 끝없는 

자신 개발 즉 좀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나도 하나님처럼"이라는 마귀적인 

내면의 악을 말하려고합니다.

 

오른손의 아들 베냐민의 정체성을 잃은 에훗이 이스라엘에 태평함을 80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지 사용받은 도구의 능력이 아니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같은 베냐민 지파에서 왼손잡이 즉 오른손이 불구인 자들을

특별히 구별하여 왼손으로도 충분히 싸울수 있는 존재로 개발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왼손으로 에글론을 죽인 그들의 조상 에훗을 잘 알고 있기때문입니다.

"오른손 없어도 승리할수 있다"라는 교만 말입니다.

바로 "나도 하나님처럼"이라는 뭔가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우월성입니다.

혹여 오해하실까 말씀드리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여 사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왼손잡이 에훗 즉 사람이 위대해 보이고 대단해 보여서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스스로 경건의 훈련을 하느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훗에게도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한 것이지 에훗이 훈련해서

이루어진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려고 열심을 내는것에 내가 드러나기위해 사용받고자 하는 

교만이 숨어있을수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방향은 나의 어떠한 모습에도 주께서 쓰시고자 할때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단해서 혹은 정말 연약해서 사용하심이 아니요 

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는 나의 주인 되시기 때문에

어디 하나 나를 드러낼 곳은 없는것 입니다.

 

블레셋은 가나안 정복당시 처음부터 쫓아내지 못하고 남겨진 곳입니다.

가나안 정복시 각 지파별로 제비뽑은 지역의 원주민들을 모두 쫓아내지 못하고

남겨진 자들을 이스라엘이 사역 즉 종이나 일군으로 썼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단 지파가 분배받은 곳인데 오히려 단 지파가 그곳을 포기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사사 삼손시대에 블레셋과의 싸움이 있지만 블레셋을 몰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블레셋은 끝까지 쫓아나지도 못했지만 사역으로 부리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로인해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블레셋이 교만한 마음의 영적의미인 만큼 우리는 주님의 나라가 임하실때까지

교만과 영적 싸움을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이쯤해서 사사 삼갈이 잠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목적을 나누겠습니다.

삼갈이 등장하는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음 사사 드보라의 노래에 있습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쳤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삿5:6-7)

드보라의 노래에 삼갈의 날과 야엘의 날을 함께 언급합니다.

그것으로 보아 드보라의 사사 시대에 아직 살아 있었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삼갈도 야엘(여인)도 이스라엘 자손이 아닙니다.

드보라의 노래는 헌신한 여호와의 백성들을 위로함도 있었지만

그 시대 마땅히 일어나야 할 존재들을 책망하는 내용으로 풍자되었습니다.

(풍자-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그대로 말하지 않고 비꼬거나 돌려서 표현하여 

그 문제점을 드러냈다는 뜻)

 

이스라엘에 대적들로 인해 무법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중에 당연히 일어나야 할 관원중에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는 

폭로는 하는 것입니다.

אֹרַח 오라흐(일반적인 통행로)- 한글번역은 "대로"라고 되어 있지만 큰 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일반 통행길을 말합니다.

עֲקַלְקַל 아칼칼(구부러진, 비틀어진 길)- 한글번역은 "소로"라고 되어 있지만 

좁은 길만 의미하는것이 아닌 어떤 상황으로 험한길로 비켜서 다녔다는 뜻입니다.

관원 פְרָזוֹן 페라존(통치자, 다스리는 자)-사사기 5장에서만 2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7절에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통치자, 11절에는 여호와께서 친히 다스리신다고 말합니다.

חָדְלוּ חָדַל 하달-(그치다, 중지하다) 2번을 반복해서 강조하며 언급합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완전히 그쳤다는 뜻입니다.

 

소모는 막대기로 소를 다스리며 농사하는 모습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왜 하필 소 모는 막대기를 하나님은 사용하셨을까요?

소 모는 막대기 מַלְמַד הַבָּקָר (말마드 바카르)-소 특히 숫소를 가르치다, 훈련하다,

이끈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막대기(말마드)는 성경에 이곳에 단 한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단어들이 대부분 희귀 단어라는 것은 특별히 깊은 의미를 주겠다는 뜻입니다.

삼갈의 이야기는 에훗의 시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훗이 에글론 עֶגְלוֹן(살진 송아지)를 죽였고 이후 80년 태평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이스라엘 관원들도 에글론과 다름없는 살진 송아지들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적 에글론(살진 송아지)를 에훗은 칼로 죽게 하였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소모는 막대기로 훈계하시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었습니다.

 

성경에 "소"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고전9:9)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호4:16)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송아지라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호10:11)

“주께서 나를 징벌하셨으므로 내가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았더니…”(렘31:18)

“애굽은 매우 아름다운 암송아지일지라도 북으로부터 쇠파리가 오리라.”(렘46:20)

모두 순종하지 않는 종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에훗이 살진 송아지 에글론 통치자를 죽였듯이 태평함으로 이스라엘 관원들도

살진 송아지가 되어 그 시대 불법에도 자신의 안위때문에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는 것을 드보라가 풍자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고 관원들이 아닌 여인 드보라와

야엘을 사용하셨고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였다고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삼갈이 사용한 소모는 막대기는 하나님의 종들을 훈련한 

도구로 보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세상의 때를 보며 주님 오심이 가까움으로 신부들을

단장시키며 주님 맞을 준비를 시켜야하는 인도자들이 세상의 핍박이 두려워

은혜 복음, 번영과 축복, 성도같의 교제와 사랑, 섬김과 봉사 등으로 설교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아닌 세상 사람을 섬기는 노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사사 삼갈의 소모는 막대기는 성령님이 이시대 주의 종들을 책망하시며

다스리시고 훈련하시는 숨은 경고의 말씀입니다.

세상 권력과 다신 종교로 연합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세상가운데 유지하는 교회

또한 교파에 소속되어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는 교회

성경에 반하는 교리들로 타락해 가는 교회안에서 침묵하고 있는 성도들 모두

주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려 찾아 오실것입니다.

그날에는 누구도 부인할수 없이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게 될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위에 은혜가되고 큰 구원의 날입니다.

 

그 날이 오기전에 스스로 점검해봅시다.

"나는 오늘날 세상에 영적 암흑기 속에서 세상이 두려워

내 안위만을 위해 다락방에 숨은것과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도

눈을 감고 침묵하고 있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닌가?"

"나는 성령님이 소 모는 막대기로 바른길로 인도하시고 훈련하시는 일에

순종하고 또 주의 손에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가?"

주님, 내게 있는 것이 작아 보여도 그것을 주님의 손에 맡기게 하소서.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주님께서 기억하시는 일에 순종하게 하소서.

내가 가진 평범한 것까지도 주님의 것이오니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나의 의를 자랑하지 않고 마지막에 모든 영광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만 돌리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