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도 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날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삿6:24)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삿6:1)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삿6:6)
오늘 묵상은 네 번째 사사는 기드온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앞에 부르짖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복된 부르짖음은 참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부르짖음이 아니라
항상 자신들의 현재 환난의 시간에서 건져주심을 위해 즉 자신의 구원을 위해
부르짖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반복하여 여호와를 떠난 긍극적인 원인이 육신의 안위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원받은 후에 평강이 유지되면 여호와의 구원이 필요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앙인들은 생활이 평안하면 종교생활을 합니다.
그런 가운데 고난이 닥쳐오면 자신의 종교 행함 곧 기도, 금식, 헌금 등을 드리며
하나님께 자신의 고난을 해결 받으려는 부르짖음을 반복합니다.
이것이 우상에 재물과 제사 지냄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나님께 지성을 드리면 감동하셔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주고받고의 원리로
하나님을 상대로 협상을 하는 것입니다.
가끔 그런 가운데 다니엘과 세 친구의 믿음으로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라는
장성한 자의 고백도 합니다.
그러나 그 상황가운데 건지심이 없고 소원이 들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낙담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플롤로그>
최근에 신앙 상담의 일부분을 나누겠습니다.
신앙인 부부가 큰 프로젝트를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그 대학에 교수로 초청될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먼저 일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감사 헌금을 먼저 드리고 매일 새벽 기도와 금식으로
대학에서 기쁜 소식이 올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 그들이 받은 결과는 자신들의 프로젝트가 대학에서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정중한 거절의 답을 받았습니다.
그때 부부는 모두 신음에 빠졌고 기도도 예배도 드릴 힘이 없어졌습니다.
남편분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기도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이 말만 반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정말 실망했습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오직 울면서 그 말만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자신의 책장에 꽂혀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의 저서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완전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책이었습니다.
책 내용은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부부는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께 망령된 외침을 하였을까 두려웠지만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어 기도드렸습니다.
자신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다 겪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보게 될 때 또 자신들의 연약함과 죄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후에 자신들의 원하던 대학 교수 자리에서 턱없이 못 미치는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고난이 올 때마다 그때에 열심히 기도하였던 시간들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고난을 주시지 않으시면 형식적인 기도와 예배로 종교생활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간증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간절함과 열심히 하나님의 일하심에 유익과 반영됨에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세상과 구별시키심 즉 거룩하게 하심에 우리가 바라는 것을
주지도 않으시고 때로는 빼앗아 가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고 나면 우리를 위함이며 천국 가서는 선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신실하시니 그 하시는 일이 다 공의와 평강으로 행하십니다.
오늘 사사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 앞에서 이 부부와 같은 마음을 드러내었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가르치시고 교훈하시며 새롭게 세워가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사 기드온과 300 용사에 대한 묵상 글이 기존에 알고 있는 여러 묵상으로 머리에
정리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사 기드온이 죽은 후에도 그의 자손들과 연결이 되어 유명한 "나무 비유"에 관한
내용들과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배신에 대한 불심판의 저주" 또한 아주 깊이 있는
영적인 묵상으로 하나님의 비밀한 말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묵상 내용들도 저는 기존의 묵상을 비워서 새 부대로 준비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만 집중하여 새 부대에 채워주시는 말씀으로 기록을 하려고 합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새롭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먼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한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선지자의 이름이나 소속 같은 거 없이 그의 역할은 오직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행하심과
그의 언약하심 그리고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고 사라졌습니다.
그 내용 중에 한 가지 살펴볼 곳이 있습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삿6:1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데 그 땅의 이방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다 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신들을 두려워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백성들의 삶과 직결된 농사에 필요한 비와 사람과 가축의 출산과 연결된 그 땅의 신이
바알과 아세라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광야 1세대들은 애굽에서 농사를 지어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에는 나일강이 있어 물의 부족함 없이 농사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나일강 자체가 그들에게는 신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광야 2세대 이후로는 그마저도 알지 못하였기에 새 땅에서 먹고살아야 하는 자손들이
풍성한 수확과 번성을 위해 그 땅 신들을 노엽게 하면 재앙이 닥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도 그런 것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 주셨기에
땅에서의 농사나 가축의 번성은 모르신다 여겼을 것입니다.
만나가 그쳤고 그 땅의 소산을 먹고 살라 하셨으니 그들은 그 땅의 생존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농사와 축산을 성공적으로 이루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시간을 함께 하셨지만 그들의 그런 삶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서 또 부르짖으니 한 선지자를 통하여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깨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알게 하십니다.
이름 없는 한 선지자의 선포에 이스라엘 정체성이 완전히 드러났고 현재 닥친 환난의 원인과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확정하시는 대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어떠함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일방적으로 부어지는 것이 은혜이며 그것을 받는 사람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 들키지 않게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미디안 사람이 추수 때가 되면 낙타를 타고 와서 식물과 가축들을 모두 빼앗기 때문입니다.
이는 미디안 사람들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유목민으로 목축을 중신으로 장막을 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낙타를 타고 가속력이 있어 다른 지역들과 교류하는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살기보다 돌아다니며 장막을 치고 머물렀습니다.
이스라엘과 미디안 땅은 먼 거리였지만 그들에겐 낙타가 무수히 많아 낮에 뜨거운 사막도
추운 밤에도 빠른 속도로 이동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낙타의 등에 장막을 치고 어디에서든 진을 치고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 그들이 그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서
메뚜기떼 같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약대가 무수함이라.(삿 6:3-5)
미디안 사람들이 낙타에 장막을 치고 이스라엘 파종 시기에 들이닥쳤는데
이스라엘은 미약하여 산과 굴에 숨어서 살았습니다.
기드온도 포도주 틀 안에서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밀은 바람을 타고 흔들며 넓은 곳에서 타작해야 하는데 좁고 어두운 포도주 틀에서 타작했으니
지극히 소량의 밀을 얻었을 것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두려움으로 적은 양식을 얻기 위해 숨어서
타작하고 있는 기드온을 여호와의 사자는 "큰 용사여"하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지극히 작은 자로 보이는데 여호와의 사자는 왜 큰 용사라고 했을까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바로 여호와의 사자는 성령이 기드온에게 임하여 계심을 본 것입니다.
큰 용사라고 부른 것은 성령의 권능이 함께하시니 강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비록 사람의 눈에는 연약하고 비겁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큰 용사로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눅 7:28)
그런데 여호와 사자의 말을 들은 기도온이 원망 같은 소리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왜 우리에게 이런 환난이 있나요?"
"조상들이 말하던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이적이 왜 없나요?"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려 미디안 손에 넘겼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의 마음에 담아둔 생각을 거침없이 그대로 쏟아 내었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대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던 백성이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는 그에 대한 변론을 하시지 않으시고 기드온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너는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은 기드온이 원망으로 쏟아낸 말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스라엘이 환난 가운데 있으니 네 조상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한 것과 같이
이적으로 미디안 손에서 구원할 것이니 너는 모세처럼 이스라엘을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막상 그 소리를 듣고는 기드온이 처음 보내심을 받던 모세처럼 자신의 약함을 말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런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여..." 말씀하십니다.
기드온이 말씀하신 이가 참으로 주님이신지 즉 여호와의 뜻이신지 표징을 요구합니다.
기드온은 신중하고 철두철미한 거 같습니다.
이번뿐 아니라 앞으로도 표징 구하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런 기드온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마음을 아시고 먼저 표징을 알려주시기도 하십니다.
그것이 7장에 적진을 치라하시면서 두려워하는 기드온에게 적진에 내겨가서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고 알려주시는 부분입니다.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능히 그 진을 치리라"(삿 7:11)
지금 여호와께서 기도온에게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이시나요?
저는 눈물이 나도록 인자하신 아버지께서 두려워서 울며 징징거리는 아들에게
"아빠가 너와 함께 할 거야 영원히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 하시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성경은 묵상하면 할수록 너무도 재미있고 신비롭습니다.
지금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대표적 인물 모세가 떠오르도록
말씀에 기록을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곳이 미디안 땅이었습니다.
모세의 삶에 첫 40년은 애굽에서 중반 40년은 미디안에서 후반 40년은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지금 기드온과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대적자들이 바로 미디안 사람입니다.
모세가 40년을 함께 하며 살았던 장인 이드로의 고향에서도 인간관계는 영원하지 못함을
잘 드러내어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 아닌 사랑과 긍휼히 여겨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다시 오늘 말씀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기드온이 주님의 표징을 요구하며 자신이 예물을 가져오기까지
떠나지 마시라고 하며 음식을 대접하듯이 식물을 가지고 옵니다.
염소 새끼로 고기와 국을 만들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어 왔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의 탈취로 궁핍한 가운데 기드온은 최상의 예물로 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볼 것은 기드온의 이런 행함이 종교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신앙인 부부의 상담 내 용이도 있듯이 우리가 자주 범하게 되는 죄성의 형상이
이와 같은 부분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우리의 행위와 열심히 보상받으려는 합리적이라는
인간 본능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도 주님의 표징을 요구하며 자신이 정성껏 준비한 예물을 가지고 옵니다.
신앙인 부부도 교수자리를 주실 것을 요구하며 감사헌금과 금식으로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신앙인 부부는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이 되지 않아 하나님께 실망했지만
만약 그들이 원하던 대로 되었다면 분명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며 많은 간증으로
성도들에게 종교성을 전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부부들을 더 낮은 자리로 낮추심으로 더 큰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정욕으로 잘못 구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가난한 마음을 주셨다는
간증으로 성도들을 바로 세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가져온 예물을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를 그 예물에 대니 반석에서 불이 나와
그 예물이 열납 되었습니다.
그때 기드온이 바로 주님의 표징을 응답받고 한 행동은 "슬프도 소이다 주 여호와여"
여호와를 대면하면 살자가 없다는 조상들이 전하는 말씀을 알았기에 두려웠던 것입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이렇게 두려워할 것이면 왜 표징을 구한 것입니까?
종교성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 너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속에 있는 불평을 모두 쏟아 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다 지켜보셨다는 것을 알았으니 자신은 죽은 목숨이라 여겼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 하였더라."(삿 6:23-24)
기드온은 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했을까요?
이스라엘이 그 땅 신들을 두려워했다고 여호와께서 한 선지자를 통하여 경책 하셨습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생존을 위해 그 신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여호와께 망령되이 행하였던 것에 당연히 죽게 될 것으로 두려워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두려움이 아닌 평강의 하나님이심을 보았습니다.
믿음이 없이 종교성으로 예물을 가져와 표징을 보여달라 했던 기드온이
정작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을 보게 되니 두려웠지만 하나님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어 진리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여호와 샬롬의 단이 세워진 곳이 오브라에 오늘까지 있더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오브라에 여호와의 평강이 있다는 것인데 오브라의 원어 어원을 추적하면
아주 영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브라 עָפְרָה 는 어원 עֹפֶר 오페르 (어린 사슴)에서 유래되었는데
오페르는 주님과의 사랑의 노래 아가서에만 5번 나옵니다.
또 עֹפֶר 오페르 (어린 사슴)의 어원은 עָפָר 아파르(먼지, 티끌, 흙)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단어가 창조적 단어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흙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즉 여호와 샬롬이 있는 자리는 사람이 자신의 처음 자리로 낮아지는 곳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오브라에게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하고 부른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흙, 티끌, 먼지 같은 존재를 높여서 부른 것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뱀에게 평생 먹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존재들은 생존을 위해 큰 용사가 되려고 스스로 열심을 내며
자신의 성을 쌓았습니다.
인간은 종교 안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큰 용사 되기 위해 열심히 행합니다.
자신의 업적을 눈에 보이는 열매로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징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큰 용사를 찾으심이 아니요 자신의 본분 "먼지, 흙" 자리로
낮아진 자 곧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오십니다.
기드온의 모습은 정말 부끄러운 겁쟁이 같아 보였습니다.
숨어서 곡식을 타작하는 모습 그리고 아비 집에 바알과 아세라상을 부수는 일도
낮에는 두려워 밤에 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들은 전혀 큰 용사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은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권능이 임합니다.
그 권능은 자신의 용사 됨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요 믿음으로만 행하여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히 13:7)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한 자는 모세였습니다.
그 행실의 종말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실(종교성)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도 실수하고 낙심도 하고 분도 내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구원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급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 14:13)
모세도 구원하시는 여호와를 선포했고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고 찬양했습니다.
모세의 노래에는 여호와께서 용사시다고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 15:3)
그런데 세상은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싸우고 스스로 큰 용사가 되려고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심판하는 죄악의 양상으로 드러납니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 6:4)
사람의 생각이 항상 악하고 죄악으로 관영하여 세상은 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때에 노아의 식구 외에는 모든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8-9)
노아가 왜 의인인지 어떻게 완전한 자인지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하였는지
성경에 기록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방주를 오랫동안 지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 가정만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큰 용사가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이 구원을 얻습니다.
모세를 믿어서도 기드온을 믿어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지만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묵상은 여기서 멈추고 다음 편으로 기드온을 계속 묵상하겠습니다.
지난주 주님의 은혜로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작년에 갔었던 바다에 다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성령님은 저에게 기드온의 묵상을 제 삶에서 연결하셨는데
정말 부끄럽게도 먼지 같은 티끌로 낮아지게 하셨습니다.
다음 편에 그 일에 대한 간증과 함께 여호와의 샬롬을 나누겠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아가서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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