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그 때에 밭 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저희가 황무한 성읍을 건축하고 거하며 포도원들을 심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9:11-15)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성경에서 단순히 물리적인 건물이 무너진 것을 넘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 은혜의 방식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원래 다윗 장막은 언약궤가 휘장 없이 드러나 있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와 찬양이 중심이었던 예배 장소였습니다 .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친밀한 관계의 방식이 사라지고,
제도와 형식이 더 강조되면서 종교화되고 그 본래의 의미가 무너진 상태가 됩니다.
아모스 9장 11절에서 하나님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겠다고 약속하시며,
이는 단순한 건축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은혜의 방식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 약속의 성취를 시작하는 것이고,
결국 신약의 교회와 믿는 자들 안에서 그 친밀한 관계가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말세에 나타날 제 3 성전 같은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사랑의 회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리라”
(כִּי אֶקַּח אֶת־מִשְׁכַּן דָּוִד הַנּפֹל, 키 에카흐 엣-미슈칸 다윗 하나폴)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מִשְׁכַּן(미슈칸)은 "거하는 장소, 임시 거처"를 의미하며 다윗 장막은
단순한 건물이나 텐트를 넘어 다윗 왕조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와 언약적 임재를 상징합니다.
נפול(나폴)은 ‘쓰러지다, 무너지다’라는 뜻으로, 장막이 무너진 상태는
통치 구조와 언약적 질서가 흩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회복 과정에서 나타나는 틈과 퇴락에 해당하는 קִמַּצְתִּי(키마츠티)와 פְּרוּצָתוֹ(페루차토)입니다.
מָצַץ(마차츠)에서 나온 קִמַּצְתִּי(키마츠티)는 ‘모으다, 좁은 곳을 모으다’라는 뜻을 지니며
하나님이 흩어진 조각들을 다시 모아 회복하신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פָּרוּץ(파루츠)에서 파생된 פְּרוּצָתוֹ(페루차토)는 ‘흩어진 곳, 무너진 부분, 방치된 틈’을 뜻하며
단순한 물리적 무너짐뿐 아니라 사회적·영적 혼란도 포함합니다.
두 단어가 합쳐진 의미는 하나님이 무너진 구조를 회복하시고
흩어진 조각을 모아 통치와 언약을 온전히 세우시는 신실하심을 보여주십니다.
또 하나님은 에돔의 남은 자와 만국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돔의 남은 자는 포로나 흩어진 자를 의미하며, 이는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만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과거 적대적 관계에 있던 민족까지 회복 계획에 포함하심을 상징합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는 다윗 장막의 회복이 이방인과 함께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 회복과 구속의 확장을 예표합니다.
이 회복의 예언은 메시아 예수 안에서 성취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에서 오셔서 무너진 장막을 회복하시고,
흩어진 백성과 이방인 모두를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모으셨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가 아모스의 예언을 인용하며 설명한 바와 같이,
다윗 장막의 회복이 특정 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온 인류에게 열린 구속적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회복시킨 혈통의 다윗의 장막이 끝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시 무너지고 흩어졌으니까요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다시 회복될때에도 "주신 땅에서" 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거할 곳 μονή (모네)'인데, 이것은 영원히 분리된 천상 저택 개념이라기보다,
함께 거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겠다.”
이 문장에서 방향을 잘 보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 있는 곳으로 올라와 영원히 머무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다시 와서 데리러 오겠다”고 하십니다.
즉 위로의 이동은 분명히 있지만, 결론은 다시 오심입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계시록을 정확히 보면,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장면은
천년왕국 장면인 20장이 아니라, 천년왕국 이후인 21장입니다.
천년왕국 동안에는 여전히 죽음이 있고, 반역이 있으며, 마지막 심판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21장에서는 이렇게 선언됩니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천년왕국은 회복과 보상과 통치의 시대이지, 완성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천년왕국 이후에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서 내려옵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의 강림은 천년왕국 때가 아니라,
천년왕국 이후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최종 상태입니다.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이 장막을 사람들과 함께 거하게 하신다고 기록합니다
(ἡ σκηνὴ τοῦ θεοῦ μετὰ τῶν ἀνθρώπων, 헤 스케네 투 테우 메타 톤 안스로폰).
여기서 σκηνὴ(스케네)는 '장막, 임시 거처'라는 뜻을 가지며 다윗 장막과 동일한 상징성을 지니지만,
계시록에서는 임시적 의미를 넘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영원하고 완전한 교제를 나타냅니다.
다윗 장막은 임시적 거처의 상징으로 시작하지만, 메시아와 성령을 통해
장막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하나님과 사람의 거처로 확정됩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위한 질서는 필요하지만,
하나님은 동시에 개인에게 직접 계시 하십니다.
언약궤가 있는 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자리입니다.
다윗 장막은 지성소와 같이 하나님의 임재는 동일했습니다.
다윗 장막에는 항상 찬양이 있었고 사람이 장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이 특별한 날의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중심이 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처소 성전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다윗에게 계시된 식양을 따라 지어졌기에 다윗 성전으로 부르기도합니다.
질서, 제사, 계급, 시간, 공간이 다시 분명해지고 절기의 절차대로 운행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으로 후퇴가 아니라 백성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는 예배로 성령의 임재를 열어주셨고
솔로몬에게는 하늘의 풍요를 열어 주셨습니다
성전은 하늘의 모형이며 공동체 전체를 위한 구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성전을 최종 목적지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무너진 솔로몬 성전의 회복을 말하지 않고
무너진 다윗의 장막의 회복을 예언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말씀은 이방인들이 율법의 단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께 나아오게 되는 사건으로 해석됩니다.
이 흐름에서 보면 모세 성막은 길을 보여주고 다윗 장막은 관계를 보여주며
솔로몬 성전은 공동체를 보호하시는 확장된 연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여지는 그림입니다.
번제단에 흠없는 제물이 되어 휘장은 찢어지고 지성소는 열리있고
언약궤는 우리 안에 자리 잡으십니다.
오늘날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심은 성전의 질서를 따라 한 단계씩 나아가는 길과
다윗의 장막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담대히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길이있습니다.
아가서에도 이 두 길을 노래하였습니다.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이는 솔로몬의 연가라 이스라엘 용사 중
60인이 옹위하였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아3:6-8)
이들을 맞이하는 존재는 시온의 여자들입니다 (아3:11)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아6:10)
이 여인은 하나뿐인 완전한 사랑 그 어미의 외딸입니다(아6:9)
또 계시록14장에도 시온 산에 섰는 144000의 존재들이 있고
19장에 세마포 입은 백마탄 군대들이 있습니다
이 두 길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설명하고 보완합니다.
다윗 장막은 성막을 부정하지 않고 성전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다윗 장막은 성막과 성전이 왜 존재하는지를 마음으로 보여준 자리입니다.
그래서 다윗 장막은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 안에 그 장막을 다시 세우고 계십니다.
계시록 4장 1절에서 요한은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 장면은 개인 요한의 계시 경험이면서 동시에, 교회가 하늘의 시각에서
역사를 보게 되는 전환점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위로 부르심”의 언어입니다.
바울도 “우리가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우리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올라감의 목적입니다.
성경에서 위로 올라감은 피난이나 도피가 아니라, 계시와 연합을 위한 초청입니다.
왕이 있는 곳으로 불려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4장에서는 곧바로 보좌와 어린양의 통치가 펼쳐집니다.
즉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은 세상을 버리고 오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게되는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내려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성경의 큰 흐름은 지금의 세상은 하늘과 땅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위로 부르십니다.
위로 불러 정결케 하시고, 다스릴 자로 준비시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우리가 영원히 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다시 하나로 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즉 지금은 올라감의 때이고 마지막은 내려옴의 때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가 되지만 땅을 버린 존재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받지만 최종 거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 된 세계입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계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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