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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시리즈 묵상

(본론)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어린 양으로 죽으신 이유)

by GOTOKINGDOM 2025. 12. 20.

 

 

 

 

 

 

 

에베소서 4:7-12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시68:18 말씀 인용)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린양으로 죽으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고 

하늘로 올라 가심으로 우리 안에 장막을 치시고 거처로 삼기 위하심인 것입니다 "

 

앞서 시리즈 묵상 서론을 에베소서 2:20... 말씀으로 "성전"과 "처소"에 대한 말씀을 계속 진행합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은 후에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 보시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주 안에서,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이렇게 모든 삶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만유 안에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뵐 수가 없습니다

만물을 보고 하나님의 현존을 알수 있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1:20)

 

 

에베소서 4:8 말씀은 우리 죄를 대신 가지고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 승천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승천하신 표현을 "모든 하늘 위"에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하늘이 파란 공중에 보이는 곳이 아닌 또 다른 우주 그리고 영계에 이르기까지 뚫고 오르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이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시편68:18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는데

그 선물이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로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충만을 사람을 통해 만물에 흘려보내시는 구조입니다

 

그럼 먼저 시편68:18 로 가봅시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라"

 

원어 시적 표현 그대로 직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עָלִיתָ לַמָּרוֹם - 당신은 올라가셨습니다 높은 곳으로
שָׁבִיתָ שֶּׁבִי - 당신은 사로잡으셨습니다 사로잡힌 것을
לָקַחְתָּ מַתָּנוֹת בָּאָדָם - 당신은 받으셨습니다 선물들을 사람 가운데서
וְאַף סוֹרְרִים - 심지어 거역하는 자들에게 까지도
לִשְׁכֹּן יָהּ אֱלֹהִים -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하여

 

이 중에 집중되는 부분은 에베소서 말씀과 상반되는 부분입니다

לָקַחְתָּ מַתָּנוֹת בָּאָדָם - 당신은 받으셨습니다 선물들을 사람 가운데서(시68)

καὶ ἔδωκεν δόματα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 주셨습니다 선물을 사람들에게(엡4)

시편에는 사람들이 가져오는 선물을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합니다

심지어 “거역하는 자들까지도”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받으심의 목적이 뒤에 붙어 있습니다.
“야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하여”

이는 사람들에게 받으시는 목적이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무엇을 받으시고 하나님을 다시 주심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는 그리스도께서 선물을 사람들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성경의 오역일까요? 아님 사도 바울이 시편을 제대로 이해 못 한 것일까요?

 

시편68은 출애굽과 광야 행진, 시온으로의 등극, 하나님의 왕권 선포가 겹쳐진 시입니다.

왕이 전쟁에 승리하고 백성들에게로 돌아올 때 반드시 따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왕은 포로를 이끌고 올라가며, 폐전국으로부터 노략물과 조공을 받습니다

또 자국 수도로 들어서면 백성들 환호의 선물을 받습니다.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6-7)

승리를 가지고 돌아오는 왕을 백성들이 맞으며 창화하는 것은 기쁨의 화답인 것입니다 

이것이 "라카흐 לָקַחְתָּ 받다"의 기본 그림입니다.

시편 68편은 바로 이 왕의 행렬을 여호와께 적용한 것입니다.

 

에베소서4장은 사도 바울이 시편을 구속사의 완성으로 연결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Διὸ λέγει·
Ἀναβὰς εἰς ὕψος
ᾐχμαλώτευσεν αἰχμαλωσίαν
καὶ ἔδωκεν δόματα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셨습니다 승천
사로잡으셨습니다 포로 된 것을
그리고 주셨습니다 선물들을 사람들에게

 

여기서 사로잡힌 포로는 사람을 직접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영적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포로 된 자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죽음으로 사망을 깨트리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증하심이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분명 예수님이 아버지께 가시면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말씀을 어떤 이들은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주신다고 말씀을 

변계 시키지만 성경에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받으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성령이 선물인 것은 그 어떤 가치로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노력과 헌신으로 성령을 보상으로 받겠습니까?

성령은 보상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성령 받지 않은 자에게 은사도 없지만 은사는 권위가 아니라 봉사를 위한 도구입니다.

성령 없이 은사가 나타나는 일은 없습니다 

 

에베소서 1:13-14 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믿은 후에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성령은 기업의 보증이라고 설명합니다.

보증이 있다는 것은 주관적 확신(소망)이 흔들릴 수 있으나 객관적 소유(그 얻으신 것)

확정(구속하시고)되었음을 뜻하며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성령이

동행하며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8: 16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분명해지는 내적 증거입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 말씀을 보셨지만 이것이 반대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대부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반대로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완성입니다.

시편 68편은 왕권의 선언이고 에베소서 4장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한 왕권의 성취를 드러냅니다.

받으심은 주심을 위한 것이었고 올라가심은 내려보내심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위로 올라가신 이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기 위해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이들을 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말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주신 선물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사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 자체가 먼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도구이며

성도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구분을 놓치면 사역자가 우상화되거나 은사가 계급화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다양한 얼굴이며 역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이셨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하는 자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목자이셨습니다. 양들을 먹이시고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교사이셨습니다. 제자로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처럼 이 모든 것에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 각 사람의 분량에 맞도록 성령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사도는 보냄과 기초 세움에 초점이 있습니다.

          복음이 아직 닿지 않은 곳, 혹은 새롭게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선지자는 말씀의 분별과 하나님의 지금 하시는 말씀에 초점이 있습니다.
         교회가 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조정합니다.

복음 전하는 자는 밖을 향한 확장에 초점이 있습니다.
         교회가 안으로만 굳어지지 않게 합니다.

목사는 이미 안에 있는 성도들을 돌보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상처 입은 양을 살피고, 흩어지지 않게 합니다.

교사는 말씀의 구조를 세우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뿌리를 내리게 합니다.

 

이 다섯은 각각 분리된 직분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는 방향성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의도는 기능의 통합이 아니라 사역의 균형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맞추어 세우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복음 전하는 자의 방향만 강해지면 연합이 안 됨으로 깊이가 얕아집니다.

목자와 교사의 방향만 강해지면 내 교인만 살피고 숫자에 집착하여 안으로만 굳어집니다.

선지자의 방향만 강해지면 공동체가 이적과 계시만 기다리며 불안정해질 수 있습니다.

사도의 방향만 강해지면 기초에만 머무는 성장 없는 미숙함이 일어납니다.

당신의 교회가 이중에 한 가지라도 균형이 깨어졌다면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은 아닙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의 연합은 각 지체의 역할에 맞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거하시매”가 헬라어로

σκηνόω (스케노오)이며 ἐσκήνωσεν (에스케노센) 은 과거형입니다.

이 단어는  σκηνή (스케네) 장막에서 나온 동사로
장막을 치다, 장막을 이루다는 뜻입니다.

육신이 되어 도신 예수님은 잠시 임시로 머무시는 장막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그를 환영하는 우리 심령에 집주인으로 내주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중 한 명이 율법과 성막 구조를 받은 모세이며 또 성전 설계를 보여주신 다윗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하나의 방식이나 틀에 고정하지 않으셨기에 다양한 사람을 

여러 방면으로 다루시며 이끄심을 보여주십니다

어떤 때는 원리와 질서를 통해, 어떤 때는 초자연적인 역전을 통해, 또 어떤 때는 강권적인 심판을 통해

그러나 언제나 관계를 먼저 중심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임재하시고, 그 임재에 사람이 반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성막과 성전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돕는 모형이지 계급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성막은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하나님을 가까이 감당할 수 없었기에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하나님은 질서와 경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임재에 이스라엘은 두려워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성막에 계심을 백성들이 보았고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함께 하시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켜주심을 믿었습니다

 

 

성막은 뜰에서 시작하여 성소를 지나 지성소로 이르는 구조를 가집니다.

이 구조는 히브리어로 (미쉬칸 מִשְׁכָּן), 곧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을 의미합니다.

바로 신약에 헬라어 "거하시매 σκηνόω (스케노오)이며 ἐσκήνωσεν (에스케노센)"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거하시되,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시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는 분입니다.

지성소에는 휘장이 있었고 언약궤는 가려져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하루(한번만 아님)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구조는 하나님이 멀어서가 아니라 백성이 아직 가까움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광야에서 모세는 성막 이전에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성막 이후에도

하나님과 대화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진 밖에서 따로 회막을 치고 여호와를 만나며,
회막 앞에 구름 기둥이 내리고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친구와 말함 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대면하다”는 (פָּנִים אֶל־פָּנִים),곧 "얼굴과 얼굴"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민감함은 성경의 중요한 패턴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질서와 체계가 필요하지만, 하나님은 동시에 개인에게 직접 오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의 시대에 이 민감함은 새로운 형태로 잠시 비밀스럽게 계시되었습니다.

 

다윗은 왕궁에 거하며 예루살렘이라는 성 안에서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약궤는 왕궁 안으로 들이지 않았고 따로 장막을 친곳에 머물렀습니다.

사무엘하 6장은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에 그 예비한 자리에 언약궤를 두었다”고 말합니다.

대상15:27-28

"다윗과 궤를 멘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자와 그 두목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각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 있게 타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

"예비한 자리" 의미는 단순히 ‘임시막’이 아니라 임재 중심의 예배와 통치, 마음 중심이 하나 됨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가 되는 장소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장막은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의 구조와 같지 않았습니다.
휘장이나 성소안 기명들에 대한 언급도 없고 제사의 규정도 나오지 않지만 기능적으로는 분명했습니다.
언약궤가 있는 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자리이며 마치 지성소만 분리된 느낌입니다

지성소(קֹדֶשׁ הַקֳּדָשִׁים, 코드쉬 하코다쉼)는 건물의 구조 이전에 언약궤가 있는 곳,
곧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자리입니다.

다윗의 때에 모세의 성막이 기브온에 있었지만 언약궤는 그 안에 없었습니다.

기브온에 있는 모세의 성막에는 지성소는 있었지만 언약궤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바로 주인이 거하지 않는 장막이며 제사를 위해 잠지 머물러 가시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장막은 지성소와 회막의 기능을 동시에 가진 다윗이 열어준 "친밀함"의 비밀이 열리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성전의 설계도를 그려주시기 전이며 성전은 분명히 다윗이 건설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장막은 다윗이 거주하기 위해 만든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온마음 다해 예배를 드리는 곳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다윗 장막에는 24 반열이 순차대로 대장 아삽을 중심으로 항상 찬양이 있었고
24시간 예배로 각종 악기를 다루는 자들로 항상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이 특별한 날만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일상의 중심이 되었고

특정한 사람 위주가 아닌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함이 친밀함으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율법 시대에 살면서도 은혜의 언어를 노래하며 시편을 남겼습니다.
행위가 없이 의로 여김을 받는 자의 복을 노래하며 신약에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자들을 보았습니다.

다윗 장막은 성막의 구조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성막의 원래 목적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휘장 뒤에 계시기 위해 임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 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심이 목적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모든 사람에게 즉시 확대되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하며 다음 글에 이어서 묵상을 나누겠습니다

언제나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친밀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