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 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창32: 25-28)

오늘은 최근 지인이 물었던 질문에 당황해서 답을 드린 후에 다시 주님 앞에 기도하며
여쭈어 보았던 가르침을 나누어 봅니다
지인이 제게 질문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실 때 뭐라고 부르시나요?"
이 질문에 솔직히 좀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저를 부르시는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내 종아" 부르시고 명하시며 보내십니다
어떤때는 "마리아" 부르시고 동산으로 데려가십니다
어떤때는 "예레미야" 부르시고 핍박 가운데로 몰아가십니다
어떤때는 "야곱아" 부르시고 내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이럿듯이 나를 부르시는 명칭이 정해져 있지 않아 지인에게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중에 가장 많이 부르시는 답을 드렸습니다
"내 종아" 이렇게 부르심은 오래되었는데 영적 신분이 여자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늘 겉옷 안에 늘 갑옷을 입고 있었고 영의 세계에서는 늘 누군가를 도피시키며
신부 옷 단장을 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의 받은 사명입니다
그러나 사실 가장 깊이 새겨지는 이름은 바로 "야곱아"입니다
그 이름의 비밀을 알게 되고 정말 서럽게 많이 울었는데 주님이 안아주실 때
내 가슴 안에 있던 응어리가 고스란히 주님 가슴 안으로 옮겨져 갔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묵상을 그날을 회상하며 성령님과 함께 동행합니다
본문 말씀은 야곱이 고향 아비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자신과의 싸움이 있던
얍복 강 천사와의 씨름이 있는 부분입니다
새 이름 이스라엘을 받는 극적인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모두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겨서 받은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던 것도 틀린 것이 아니지만 좀 더 자세히 이 말씀이 내게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등장인물에 있었던 이야기로만 알면 내 삶에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심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종교생활만 하다가 자신은 전혀 이 땅 백성에서 천국 백성의 삶으로 변화되지 못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 이름으로 변하게 된 것은 자신의 힘겨운 싸움의 결론을 직시했기 때문입니다
평생 속이는 자로 자신의 꾀로 살았던 야곱입니다
그렇게 아내도 얻고 자식도 낳고 재물도 모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도 장인 몰래 도망가야 했고
형 에서에게 죽을까 두려워 자신의 꾀로 형의 마음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미 하나님은 야곱에게 함께 하실 것이란 약속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신앙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며 사는 삶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의심도 올라오고 두려움도 생기고 끊임없이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하려고
노력도 하는 그런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정죄하고 판단하며 외면해서도 안 되며 또 본인도 그것으로 인하여 자괴감이나
상실감과 무력함으로 치부하여 낙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나 현재 모습은 장차 우리의 모습의 변화에 대한 결론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속 사람을 알 수 없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이 성장시키고 있는 과정에
그 종을 분별한다고 판단을 하게 되면 그 기르시는 주인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래 그림을 보시면 사람이 뿌리채소인 당근을 보고 있습니다
당근은 위로 자라는 나무를 먹는 것이 아니고 뿌리를 먹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위로 자라는 나무가 커서 아래 뿌리도 클 것이라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뿌리로 가는 영양분을 위로 보내게 되너 정작 뿌리는 크게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근을 기르는 농부는 자라나는 당근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관심 있게 늘 사랑을 주며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사랑으로 기르시는 농부입니다
우리를 심으시고 또 어떤 모습으로 자라나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현재에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낮은 나무지만 추수 때에 그 본모습이 드러날 때에
그 이름에 걸맞도록 자란 결과물로 보일 것입니다
자 그럼 야곱의 결과물을 보러 가볼까요 ^^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וַיֹּאמֶר אֵלָיו מַה־שְּׁמֶךָ
바요 메르 엘라브 마-쉐메카
“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단어를 하나씩 보면 의미가 깊습니다.
וַיֹּאמֶר (바요메르) 어근은 אָמַר (아마르) “말하다”
와우 연속법이 붙어 “그리고 그가 말했다”라는 서사적 진행형입니다.
מַה (마) “무엇?”
שְּׁמֶךָ (쉐메카) 기본형은 שֵׁם (쉠) “이름”
뒤의 ךָ (카)는 “너의”라는 2인칭 남성 단수 소유격입니다.
즉 “너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모르셔서 물으셨을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이름(שֵׁם, 쉠)”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와 본질,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야곱(יַעֲקֹב, 야아코브)이라는 이름은 어근 עָקַב (아카브)에서 왔습니다.
뒤꿈치를 잡다, 속이다, 치고 올라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는 실제로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고, 형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았으며
영적 장자의 계보로 싸워 치고 올라간 자입니다.
그러므로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
“지금까지 어떤 존재로 살아왔느냐?”를 물으시는 회개의 토설을 끓어내시는 질문입니다.
야곱은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라 “저는 다른 사람 뒤꿈치를 붙잡는 자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속이는 자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싸워 치고 올라서는 자입니다"
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며 토설하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야곱이 이 알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을 이렇게 고백할 때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지금 야곱이라면 지금 솔직한 심정은 어떻습니까?
각자 생각이 많을 것입니다
씁쓸하다, 부끄럽다, 통회하며 가슴을 친다, 원망과 하소연한다, 힘겨운 삶에 연민으로 운다.
이 외에도 많은 감정들이 각자의 모습에서 터져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느낀 야곱의 심정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여러분 야곱은 평생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성경을 떠 올려보세요 야곱이 자신을 마지막 소개한 장면 말입니다
וַיֹּאמֶר אָבִי 바요메르 아비 “내 아버지여”
וַיֹּאמֶר הִנֶּנִּי מִי־אַתָּה בְּנִי
바요메르 힌네니 미-아타 베니
“나는 여기 있다.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אָנֹכִי עֵשָׂו בְּכֹרֶךָ
아노키 에사브 베코레카
“나는 당신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거짓 정체성을 말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준비한 별미를 들고 형의 옷을 입고 몸에는 염소 새끼 가죽으로 덮어서
형 에서 장자의 축복을 아비를 속여 받았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말해본 적이 없습니다
평생을 형 에서 이름의 존재가 되기 위해 늘 씨름하며 자신의 꾀로 사람을 속이는
야곱 이름의 본성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씨름하는 상대로 나타난 천사가 묻는 것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야곱은 하나님 얼굴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토설합니다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 이때가 하나님 얼굴 앞에서 직접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입니다
마지막까지 에서를 속이려고 잔꾀를 부렸던 야곱이 400명을 이끌고 달려오는 에서 앞에서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 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יָכֹל (야콜) 어근 יָכֹל (야콜) “능하다, 이기다, 감당하다”
여러분 어떠세요? 뭔가 다른 느낌이 들어오나요?
평생 다른 이름으로 속이고 살다가 진짜 이름을 들었을 때 느낌이 어떨 거 같으세요?
사기꾼이 왕실 왕자의 이름으로 살고 있다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마음 두려움과 당황함과 괴로움으로 밀려올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미지는 성경 인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자 가브리엘이 말합니다.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느니라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단 9:22-23)
“그가 내게 이르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단 10:11)

잘 아시겠지만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다니엘이라는 이름에서 벨드사살로 바뀌었습니다
다니엘을 지혜와 꿈 해몽으로 포로의 신분에서도 고위층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하나님 나라 백성에서 변하여 다른 신분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דָּנִיֵּאל (다니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 (דָּן 단, 심판하다 + אֵל 엘, 하나님)
벨드사살은 בֵּלְטְשַׁאצַּר (벨트샤차르) 바벨론 신 벨(Bel)을 포함한 이름입니다.
아카드어 이름이고 뜻은 대략 “벨이 그의 생명을 보호하다”입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에는 엘(אֵל), 벨드사살에는 벨(Bel)이 들어 있습니다.
이름 자체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상징합니다.
바벨론 왕실 환관장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이름을 바벨론식 이름으로 지어줬습니다

다니엘은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주관하여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벨드사살(벨신이 그의 생명을 보호한다)라고 부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위대한 일을 행하고 왕실의 안위를 지켰다 해도 그의 이름은
늘 바벨론의 벨 신을 높이는 자였습니다
그런 벨드사살에게 자신의 존재를 다니엘 (하나님이 나의 심판자)라는 존재로
불려졌을 때 그 감동이 어떠했겠습니까?
자신의 진짜 존재성을 드러내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순간입니다
위에 당근을 기르는 농부의 마음처럼 다니엘의 본 정체성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잎은 보잘것없어 그 존재를 알 수 없지만 뿌리채소의 본형으로 잘 자라고 있는 것과 같이
다니엘도 겉모습은 바벨론 포로의 신분으로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으나
그 본질은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입은 다니엘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불러 주지 않던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야곱이 이스라엘 이름을 받는 순간을 찾아갑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5-26)
לֹא (로)“아니다, 못하다”
יָכֹל (야콜) 어근 יָכֹל (야콜) “능하다, 이기다, 감당하다”
직역하면 "능하지 못함","이기지 못함","감당하지 못함"
여기서 “이기다”는 단순 승패가 아니라 “능히 제압하다, 압도하다”는 의미입니다.
천사가 단순히 힘이 약해서 진 것이 아니라 야곱이 끝까지 놓지 않았다는 뜻이 더 강합니다.
הֵאָבְקוֹ (헤아브코) 어근 אָבַק (아바크)“씨름하다, 몸을 비비며 싸우다”
이 단어는 매우 독특합니다.
어근 אבק (아바크)는 “먼지”라는 뜻도 있습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몸을 맞대고 뒹구는 격렬한 씨름이라는 것입니다.
וַיִּגַּע בְּכַף־יְרֵכוֹ
바이가 베카프 예레코
וַיִּגַּע (바이가) 어근 נָגַע (나가) “만지다, 닿다, 치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강하게 때렸다”가 아니라 “닿았다, 건드렸다”는 표현입니다.
강타가 아니라 ‘접촉’입니다.
בְּכַף (베카프) כַּף (카프) “손바닥, 움푹한 부분”
יְרֵכוֹ (예레코) יָרֵךְ (야레크) “넓적다리, 허벅지”
직역하면 “허벅지 움푹한 부위를 만지셨다”
이 단어들을 보면 천사는 밤새도록 씨름을 하면서 야곱을 강제로 제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야곱에게 스스로 항복하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야곱의 힘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붙잡는 자였습니다.
형의 발꿈치를 붙잡았고, 축복을 붙잡았고, 라반의 재산도 붙잡았고,
이 밤에도 축복을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붙잡는 손”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걷는 힘”, 자기 힘으로 나아가던 근원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름이 바뀝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부서짐 속에서 이긴 자의 이름으로 바뀝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스라엘은 יִשְׂרָאֵל (이스라엘)
어근은 שָׂרָה (사라) “다투다, 싸우다, 다스리다”
엘(אֵל)은 “하나님”
보통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또는 “하나님과 씨름한 자”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길자는 없습니다
천사가 살짝 건드린 것에 환도뼈가 빠지는데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습니까
이 안에서 고집스럽고 완고한 우리 자아를 발견해야 합니다
야곱이 천사를 놓지 않았던 것은 사실 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자신의 목숨이 달려있는 그 축복의 길을 놓으면 죽음인 것을 어떻게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야곱 이름의 뜻에 대한 절정입니다
탈골된 다리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그 손으로 붙들지 않으면 끝입니다
"발꿈치를 붙드는 자" 이름은 이때 온전히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끝까지 놓지 않으시고 붙들고 계심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갈망을 곧 소망의 연단으로 붙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물으심으로 옛 정체성을 드러내게 하시고 야곱이라는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
새 이름을 주심으로 새 정체성을 선언하십니다.
그 결과가 창세기 32:31입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씨름은 끝났고 빛은 올라왔고 그는 절었습니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걷던 힘이 부서져서 항복할 때 주님의 승리를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세상의 원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설입니다
꺾여야 세워지고, 비워져야 채워지고, 죽어야 다시 살아나는 복음의 비밀이
야곱의 환란에 고스란히 숨겨져 있습니다
자 그럼 이제 "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실 때 "야곱이니다"라고 고백하는
당신의 심정이 어떤 마음입니까?
바로 평생 묵었던 죄가 고스란히 모두 내 안에서 빠져나가는 고백입니다
속이는 자로 살았던 나를 진정으로 회개하는 장면입니다
야곱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32:30)
פְּנִיאֵל 프니엘 (Peni'el)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פָּנִים (파님) “얼굴, 임재, 앞”
אֵל (엘) “하나님”
따라서 뜻은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모세가 받은 10 계명에 제1 계명입니다
“너는 내 얼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פָּנָי (파나이)“내 얼굴 앞에”입니다.
공통 단어는 פָּנִים (파님), 얼굴입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창32:31)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면할 때 참 회개가 이루어집니다
야곱은 하나님 얼굴을 대면하고 지날 때 빛을 받은 것입니다
환도뼈로 인해 절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연약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 16-17)
사도 바울은 할례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조하며 이렇게 끝을 마무리합니다
육신으로 행하는 할례와 영적으로 행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분별의 눈으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을 대상을 말하며 규례를 행하는 자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라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 얼굴을 대면한 야곱 곧 자신을 내려놓은 이긴 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절었고, 바울은 예수 십자가 은혜의 흔적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온전히 회개한 자는 심판대에 서게 되면 마귀의 참소 앞에 오직 예수의 은혜만 보입니다

그럼 이렇게 하나님을 대면한 자들은 어떻게 변하는지 보겠습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창33:1-4)
어떠세요 너무 감동적이지 않나요 화가 변하여 희락이 되는 원리입니다
가장 먼저는 야곱이 모든 소유와 가족들을 앞세우고 뒤로 빠져있다가
이제는 가장 앞서 나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저는 다리를 가지고 형 에서 앞에서 일곱번을 땅에 굽혔습니다
그만큼 자신을 돌아본 자들은 낮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면 가장 큰 죄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직도 자기 자랑하고 사람을 높이며 그를 섬긴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자들은 절대 사람을 높일 수가 없으니까요
하나님을 대면했다면 자신들의 연약하고 죄된 본성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높여드립니다
그런 죄인이 하나님을 대면하고서도 죽지 않은 것이 은혜 때문이니까요
그것을 증거 하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주님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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