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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단편 묵상

말씀의 떡을 먹고 성장하는 자는 포도주 소망까지 바라본다

by GOTOKINGDOM 2026. 4. 4.

 

오늘은 부활절을 기념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대하여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마지막 때를 살면서 마땅히 알고 행해야 하는 그 사랑을 묵상해 본다 

먼저 마지막 때를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묵상하려 했으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급히 방향이 바뀌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실때 오직 성령이 임하심을 기다리라 하셨다

그 말씀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이 우리의 삶에 전부라는 것이 새삼 감동이 되었다

 

그리고 묵상글이 마무리될때 이 말씀이 노아의 때와 롯의 때 주신 말씀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았다

늘 알고 또 새롭게 깨닫게 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은 내게 깊이 잠잠해지는 감탄을 자아낸다

오~주님 어찌 그리 심묘막측(深妙莫測) 하시나이까 
뜻: 너무 깊고 오묘해서 헤아릴 수 없음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의 때를 설명하시며 특별히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심판이 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의 초점은 죄의 목록이 아니라 “깨닫지 못함”이다. 

사람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사고 팔고 심고 집 짓는 것은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심판날은 누구나에게 평등하게 내려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 

일상에만 충실한 상태는 "그날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17:22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보다”는 헬라어 ὁράω(호라오)로,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그날을 간절히 원하게 되지만, 그 날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그 날을 맞이하는 방식이 다름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이어서 마지막 때의 장면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주신다.

 

누가복음 17:34
“그 밤에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여기서 “밤”은 헬라어 νύξ(뉙스)로, 단순한 시간대가 아니라

"영적 어두움과 무감각"을 상징한다.
“누워 있다”는 표현은 κλίνη(클리네)로, 단순히 잠자는 상태가 아니라

"어떤 자리에 안착하고 머무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 속에서 자신의 삶에 안주하고 있지만,

그 동일한 자리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맞게 된다.

겉으로는 동일하지만 내면의 상태에 따라 완전히 나뉘는 것이다.

이 장면은 창세기에서 요셉에게 꿈을 말했던 두 관원을 떠올리게 한다.

한 사람은 술 관원으로 회복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떡 관원으로 새에게 쪼여 죽게 된다.

같은 환경, 같은 상황 속에서도 결과는 달랐다.

언제나 이 말씀을 볼 때면 궁금했다

왜 술 관원은 살고 떡 관원은 죽은 것일까?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따라 생명과 죽음이 갈라진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 말씀으로 그 비밀이 풀어진다 

 

누가복음 17:37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여기서 “주검”은 헬라어 σῶμα(소마)로,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생명이 떠난 상태"를 의미한다.
“독수리”는 ἀετός(아에토스)로, 시체를 먹는 맹금류까지 포함하는 표현이다.

이 말씀은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곧 하나님 이시니라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생명이 없는 곳에는 반드시 부패와 심판이 따른다.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는 결국 생명이 없음과 사망의 결과로 이어진다.

이 흐름이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찬 말씀과도 연결된다.

 

마태복음 26:29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는 아버지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새것”은 헬라어 καινός(카이노스)로, 단순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움"을 의미한다.

이는 하늘나라의 생명과 기쁨, 완성된 구속의 상태를 가리킨다.

천국에는 아직도 누군가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포도주 잔이 비어있다

 

결국 성경은 하늘의 생명과 땅의 생명을 두 흐름으로 보여준 것이다.

하나는 이 땅의 떡, 즉 현재의 필요와 일상에 묶인 삶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새 포도주를 소망하며 사는 삶이다.

마태복음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시되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시되 너희가 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나의 피 곧 언약(διαθήκη, 디아티케)피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2:19–20
“떡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만찬의 말씀은 조금씩 다르게 기록이 되어있고

표면적 말씀으로는 떡과 포도주의 차이를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차이는 마지막 때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히브리서 11:35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여기서 “더 좋은”은 κρείττων(크레이톤)으로,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을 의미한다.

단순히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더 큰 영광의 상태를 말한다.

 

요한계시록 20:4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이것이 첫째 부활이다.

어떤 이는 살아서 들림을 받고, 어떤 이는 순교를 통해 이 영광에 참여하지만,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노아의 때와 롯의 때는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마지막 때의 그림이다.

같은 일상을 살아가지만 누구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모신 삶이 있고
누구는 생명이 없는 주검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 결과는 같은 자리에 있지만 누구는 데려감을 받고 누구는 남겨진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다루지 않으신다.

계시록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분명 마지막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신다 

그렇게 각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이끄신다.

그래서 이 말씀의 핵심은 두려움이 아니라 초청이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나는 떡을 붙잡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멈추어진 상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새 언약을 세운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상태까지 소망하는가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제자들에게 함께 주어졌는데 그것을 왜 나누는가 하겠지만

예수님이 주신 만찬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는 것은 여기서 비밀이 풀린다

예수님이 택하신 12 제자 중에 예수님을 팔자가 이미 시편에 예언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바로 가룟 유다이다 

시편 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요한복음 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예수님이 택하신 자들이 모두 떡과 포도주를 먹은 것이 아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발도 씻겨 주셨으나 깨끗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떡을 받는 순간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고 

생명 되신 빛이 비추이자 그는 어두운 밤으로 나가버렸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잔 곧 새 언약의 포도주를 받지 않았다 

요한복음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요한복음 13: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에 연결되는 말씀들이 모두 떡만 먹은 자들과 새 언약의 포도주까지 마신자들의

구별되는 삶을 나타내고 있다 

즉 예수님의 몸으로 표현하신 떡을 먹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를 나타내며 그의 일을 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로 말하면 사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몸은 일부분에 속하는 것이며 택함 받은 자 안에도 가룟 유다처럼 타락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어떤가?

사람에게 어느 한 부분 피가 없는 곳은 없다 

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자들은 주께서 가시는 어디에든 함께 한다는 뜻이다 

그들이 계시록에 여자로 더불어 더러워지지 않은 자들이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르는 자들로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계 14:4-5 참고)

 

이렇게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더 나아가 하늘에 신령한 포도주까지 소망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은 단순히 성도 간에 나누는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생명을 주심 같은 사랑을 말한다 

율법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란 말씀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이 율법의 계명과 같다면 새 계명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을 말한다

율법의 사랑은 내 몸과 같은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이라는 것은 목숨을 주는 사랑이 아니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 나를 죽이지는 않는다 

이것보다 몇천배? 아니 몇만배? 말로 표현도 안 되는 사랑을 말씀하신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절대 할 수 없는 사랑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연합되어 하나가 된 자들이 가능한 사랑인 것이다 

 

요한일서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목숨”  ψυχή (프쉬케)
단순한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자아, 존재 전체, 삶의 중심

“버리다”  τίθημι (티데미)
억지로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놓다, 자발적으로 드리다

“마땅하다”  ὀφείλω (오페일로)
선택 사항이 아니라 마땅히 져야 할 책임, 빚진 상태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 사랑과 같은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는 선언이다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연합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할 수도 없다

그 사랑을 깨달은 자들은 스스로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간다

그 길은 외로운 길이 아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교회 안에서 안주하며 그 계명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포도주 잔이 아닌

음녀의 포도주 잔을 마시며 미혹될 수도 있다 

음녀의 포도주로 더러워진 자들은 그리스도의 진노의 포도주 심판에 던져진다 

계시록 14: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 받으리니

계시록 17: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 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당신은 깨어 있는가, 아니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안주하고 있는가?

인자의 날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그날은 단순히 모두가 동일하게 겪는 날이 아니라, 각 사람의 상태가 드러나는 날이다.

결국 깨어 있는 자는 그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함으로 맞이하게 된다

이미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날을 소망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는 사랑 안에 거하기를 힘쓰고

하나님도 그와 함께 거하시며 온전한 사랑을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 1서 4: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