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독과 그와 함께한 모든 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더니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삼하15:24-26)


오늘 말씀 묵상은 다윗이 얼마나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는지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우리 삶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사는 것과 내 마음대로 사는 삶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모두가 교회를 나가고 예배드리며 헌금을 내고 헌신과 봉사를 하지만 사실 깊이 생각하면
나의 의로 자랑하고 사람이 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종교 생활이 헛된 일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행한 선한 일들은 우리가 천국에 가는 날 분명 심판에서 플러스 점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마음은 온전히 나를 주님께 드리는 것 아닐까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다윗은 어려서부터 성령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친히 양육하셨고 육신이 성장하는 과정도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도 모두 함께 하셨지요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 그 고난과 시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도 혈기가 있었고 다윗도 원망이 있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을 시편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노래하였다는 것은 정말 부러운 영성입니다
다윗의 모든 삶을 두루마리에 하나하나 기록하시듯이 우리의 모든 삶도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셔서 모두 기록하고 계실 것입니다

다윗의 아름다운 시편 노래를 한곡 엄청 부러운 마음으로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로 수치와 멸망을 당케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시편 71:12-20)
먼저 가슴이 설레이는 단어들이 보입니다
다시 살리시며(부활)와 이끌어 올리시다(휴거) 아주 뭉클한 단어들이지요?
문맥으로 보면 이미 죽은 자에게 하는 말인데 영적으로 보면 우리에게 모두
소망이 되는 단어들입니다
위 내용을 보면 다윗이 평안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또 나 같으면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많은 고난 가운데 두셨나
불평했을 거 같은데요
다윗의 노래를 보면 변함없는 요동하지 않은 반석 위에 견교하게 서 있음이 느껴집니다
마치 나무 가지가 말라가도 나무뿌리를 뽑지 않고 가지만 잘라내듯이
생명의 근원이 뿌리에 있음을 잘 아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이 교훈하시고 바른길로 인도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늙어서까지 그 교훈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도 알기에 자신의 간절함을
늘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듯이 표현을 합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다윗은 자신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도 이해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에녹도 엘리야도 죽지 않았으니까요
엘리야는 다윗의 후대 사람이지만 에녹은 조상이지요
죽음을 보지 않고 성령님과 동행하다가 들림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에녹같이 되기를 구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받은 사명을 분명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눈에 띄게 하나님 사람들의 끝이 어떤지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죽음을 맛보지 않고 들림 받은 에녹과 엘리야
둘째 수명이 다 되어 늙어 자연사
셋째 수명 중에 병들어 병사
넷째 수명 중에 갑자기 당한 사고로 급사(전쟁, 살인, 사고)
대부분 첫 번째를 빼고 모든 사람이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윗도 이중 하나로 늙어 제 수명을 다하고 자연사를 하였습니다
믿는 모든 성도들은 두 번째 여기까지가 가장 축복받은 삶 같습니다
우리 모두 귀하신 은혜를 받은 자로 다윗처럼 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오늘 묵상 내용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먼저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는 본문은 사무엘하 15장 13-30까지입니다.
압살롬의 반역 소식이 전해지자 다윗은 즉시 도망을 선택합니다.
중요한 점은 다윗이 군사적 판단만 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왕권을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제사장 사독에게 언약궤를 다시 성으로 메어가라 말합니다.
이 고백은 다윗의 인생에서 매우 깊은 지점입니다.
사울에게 쫓길 때와는 다른 태도입니다.
그때의 다윗은 약속을 붙들고 기다렸지만, 지금의 다윗은 삶의 판단조차 하나님께 맡기고
결과에 대해 아무 조건을 달지 않고 순종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낳은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 금식하며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결국 죽었습니다
아이가 죽기 전에 금식하던 다윗이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바로 씻고 먹기 시작했을 때
신하들은 이상히 여겼지만 다윗은 그때만 해도 기도로 간구하기를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뜻에 다윗의 기도를 최고 빨리 응답하시는 방법은 아이를 빨리
데려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의 기도는 반드시 선한 방향으로 응답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을 잘 받는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이라 믿고 그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기도받으려고 머리 숙이는 일이 테반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그림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이 있습니다
다윗이 올바르지 않게 낳은 아들을 살려두면 평생 사단이 그 사건으로 틈을 타고 괴롭힐 것입니다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고 다윗이 금식으로 몸을 상하지 않도록 그 아이를 하나님 품에
앉고 가시는 것이 가장 선한 응답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의 사람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음이라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
밧세바 사건 이후로 자신에게 내려진 벌이 있다는 것을 다윗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지금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칼이 네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다윗이 상상이나 했을까요?
자기 아들이 이 일을 행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요
압살롬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다스리는 동안 태어난 셋째 아들입니다
대략적으로 볼 때 다윗이 밧세바를 범할 때 압살롬의 나이 15-22세 정도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이성이나 사고적 판단이 서있을 나이입니다
왕인 아버지가 후궁을 많이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인의 자녀를 옳지 못한 행동으로 얻었다면
아버지에 대해 아들이라도 마음에 사고적 판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후에 압살롬 누이 다말이 이복형에게 욕보임을 받았을 때도 다윗을 아무런 징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이 아버지의 그런 행동들에 많은 상처와 감정이 쌓였을 것입니다
그런 사건을 아는 사람을 통해 사단은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이미 이 벌은 하나님이 내리신 것입니다
그것을 사단을 사용하시고 허락하신 것이지 사단 자체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모든 죄에 대하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먼저 점검하고 바로 세우는 것이 먼저이지
사단과 100 날 싸우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머물러 두어 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삼하 16:21)
위 말씀은 다윗의 후궁들을 범하도록 시킨 사람이 아히도벨입니다
아히도벨은 바로 밧세바의 할아버지입니다
“그가 말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밧세바라 하니라”
“엘리암은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이더라”
이렇게 성경을 보면 아히도벨은 밧세바 친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사위가 죽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손녀가 왕의 아내가 된 것인데 싫었을까요?
아히도벨은 다윗의 절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등진 것은 바로 가문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족보에는 솔로몬을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낳았다고 기록을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아비의 이름으로 대를 이어가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나님이 구별한 민족 정체성이지요
그런 가문에 아비가 사라졌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면 그 가문은 역사 안에서 사라집니다
성경에는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을 끝으로 자손 이야기는 없습니다
바로 밧세바가 딸이며 우리야가 남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야는 이방인 헷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Uriah (אוּרִיָּה, 우리야)
뜻: “여호와는 나의 빛 =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다”
이름부터 이미 여호와 신앙에 들어온 이방인 사람이라는 매우 중요한 증거입니다.
우리야는 아히도벨의 가문을 이어갈 아들의 존재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다윗은 아히도벨의 가문을 끊어버렸지만 역사적 족보에는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솔로몬을 우리아의 아내에게 낳았다고
보아스가 룻에게 오벳을 낳은 것과 같이 고엘(기업 무를 자) 역할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범죄를 인해 아히도벨을 사용하셨지만 아히도벨의 끝은 참 허망합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자살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그의 모략은 탁월했습니다
그때에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삼하 16:23)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이 아닌데도 그런 것과 다름없이 적중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을 할 수만 있다면 넘어트리려고 사단은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열심히 특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그런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 다윗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데를 보이시리라"
이미 다윗의 현재 상황은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가 만든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을 때 현재의 상황은 결정이 났습니다
그럼 현재 상황을 바꾸기보다 현재 때문에 미래를 바꾸어야 됩니다
지금 상황을 바꾸려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은 밧세바를 범하여 낳은 아이가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금식했을 때와 같은 것입니다
다윗이 이후로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십시오
자신의 앞길을 온전히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언약궤를 자신이 가는 곳으로 함께 가져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으로 다윗을 기름 부으셨기에 자신을 세우신 이는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자신이 계실 곳을 스스로 정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신 12:5)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왕상 8:6)
“내가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를 건축하였나이다.”(왕상 8:13)
‘거룩한 궤를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한 전(성전)에 두고,
다시는 너희 어깨에 메지 말라’ 하고…”(대하 35:3)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다윗이 점점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곳을 정하셨기에 지금은 자신이 떠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내 뜻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뜻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윗은 알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다윗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을 믿었기 때문이며
장성한 자의 믿음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 " 했던 것과 같이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올려드린 것입니다
다윗은 현재 있는 일이 과거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현재의 일은 미래를 만든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당장 왕권을 되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남느냐가 더 중요해진 상태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감람산을 오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단순한 슬픔이나 부끄러움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회개의 몸짓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걷는 모습은 애통과 자기 낮춤의 상징입니다.
다윗은 더 이상 왕의 위엄으로 상황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주인을 부끄럽게 만든 종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이는 다윗을 따르던 모든 백성들도 동일시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잠잠히 계셨을까요?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침묵이 필요한 순간에 침묵하십니다.
특별히 회개가 말이 아니라 마음과 자세로 이루어져야 할 때, 하나님은 말씀을 거두십니다.
다윗에게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밧세바 사건 이후 “칼이 네 집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의 열매가 눈앞에 펼쳐지는 과정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신다면 다윗은 또 이해하고 해석하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설명을 듣는 자리에 머물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자리로
가길 원하셨습니다.
침묵은 버림이 아니라 깊은 다루심입니다.
시편 51편과 32편을 함께 놓고 보면 이 시기의 다윗 마음이 드러납니다.
다윗은 죄 사함을 받은 왕이었지만 그 죄의 결과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깨어질 수 있는지를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단순히 아들의 문제라기보다 다윗 안에 남아 있던 왕으로서의 주권,
아버지로서의 책임 회피, 공의를 미루었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왜 그랬느냐”라고 다시 묻지 않으십니다.
대신 다윗이 스스로 낮아질 공간을 마련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변명하지 않고 “내게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선히 여기다는 말은 טוֹב בְּעֵינָיו 토브 브에이나브인데,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대로라는 뜻입니다.
자기 기준을 완전히 내려놓은 고백입니다.
압살롬의 일로 하나님은 다윗에게 회개만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회개 이후에도 남아 있는 교만의 잔재, 판단하려는 습관,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지 못했던
삶의 태도까지 다루고 계셨습니다.
다윗이 성장하고 장성한 자가 되기 위해 계속 양육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윗이 울며 걸어가도록 허락하십니다.
그 길 위에서 다윗은 다시 왕이 되기 이전의 사람으로 돌아갑니다.
이 침묵 속에서 다윗은 다시 시편의 사람이 되고, 통치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한 사람으로 정금 같이 정련됩니다.
그리고 이 낮아짐이 훗날 솔로몬에게 왕권이 넘어갈 수 있는 영적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기뻐하시면”이라는 표현에서 기뻐하다는 동사는 רָצָה 라차 입니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이 아니라 "받아들이다, 열납하다, 제사를 받으시다"라는 뜻으로
제사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받아들여질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왕으로 받아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존재 자체가 다시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 있기를 바라는 고백입니다.
왕권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다시 돌아오게 하사”에서 돌아오게 하다는 הֵשִׁיב 히쉬브로, 돌이키다, 회복시키다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단어가 회개하다는 뜻의 שׁוּב 슈브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돌아오는 문제를 자신의 회개와 분리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이켜 주시면 자신이 돌이켜진 존재가 된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우리 스스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궤와 그 계신 데”에서 계신 데라는 말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מִשְׁכָּן 미쉬칸 개념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거하시기를 선택하신 자리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이라는 정치적 수도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임재의 자리를 더 중요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붙들고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이용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26절에서 “기뻐하지 아니하시거든”이라는 말은 앞선 רָצָה 라차의 부정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지 않으실 가능성을 입에 올린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문장은 매우 담담합니다. 항변도 감정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판단하실 수 있음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에서 여기 있나이다는 הִנְנִי 히네니 입니다.
이는 단순한 위치 표현이 아니라 부르심 앞에 서는 응답의 언어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사용한 바로 그 단어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다시 불려 나온 종으로 서 있습니다.
“종”이라는 단어는 עֶבֶד 에베드입니다.
다윗은 이 장면에서 단 한 번도 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에베드는 주인의 뜻에 전적으로 속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은 스스로 왕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소유로 자신을 규정합니다.
마지막으로 위에 먼저 살펴본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옵소서”에서
선히 여기다는 טוֹב בְּעֵינָיו 토브 브에이나브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그분의 눈에 좋은 대로라는 뜻입니다.
윤리적 선악 판단보다 하나님의 시선이 기준이라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옳은 것이 무엇이든 그대로 받겠다는 태도입니다.
행하시옵소서라는 동사는 עָשָׂה 아사로, 만들다, 이루다, 행하다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만들어 내시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 본문에서 숨겨진 가장 중요한 점은 다윗이 한 번도 죄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단어가 죄인으로서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 일어나는 현상은 과거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명 없는 회개, 결과를 조건으로 달지 않는 복종,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스스로 낮아져서 자신이 서 있을 곳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은 언약궤 임재 안에 머물지 못하지만 반드시 다시 임재 안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며
점점 더 낮은 마음으로 자신을 비워 나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로 하나님 이름을 욕보였음에 자신의 머리를 감추고 울며 맨발로 걸으며
회개의 깊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침묵하셨지만 아픈 다윗의 마음을 고스란히 다 새겨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비를 대적한 압살롬을 벌하실 때 그 아름다운 머리를 나무에 매달아 심판하십니다
자신의 아름다운 머리 곧 자신이 우상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는 낮아짐을 택했고 압살롬은 자신의 머리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시 147:6)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오늘 다윗이 행한 일과 그 마음을 묵상하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현재 있는 일은 과거의 나의 행동이 맺은 열매이고 현재 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나의 미래가 결정되겠다는 지극히 평범한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우리는 현재 있는 고난에 집중을 합니다
고난을 넘겨주시라고 현재를 붙들고 주님께 매달립니다
아니 것입니다 현재는 지나가는 미래 안에 있는 것입니다
현재에 붙들려 있으면 미래도 바뀌지 않습니다
다윗이 감람산을 오를 때 무엇인가 붙들고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위해 언약궤를 가져가지 않았고, 자신을 따르려는 제사장들도 가드 사람 잇대와
함께 온 600인들에게도 돌아가라 권했습니다
심지어 바후림에서 자신을 저주하는 시므이에게도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써 권위도 지휘력도 주권도 원수 갑음도 모두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현재 있는 일에 가장 지혜로운 대처법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지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믿으며 신실하신 언약을 붙드는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한국행 여정이 생겼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1년 1차 한국을 가게 하십니다
이전에는 경제적 사정으로 한국 갈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경제적인 사정이 나아졌다기보다 성령으로 인도받는 삶에
물질에 대한 가르침도 주어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니던 교회를 나오기 한 달 전부터 십일조를 내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물질에 대한 시험에 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도 바울이 연보를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너희의 연보(헌금)에 대하여 마케도니아 인들에게 자랑하였나니
아가야에서는 작년부터 준비하였다고 하였거늘
너희의 열심히 많은 사람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고후 9:2)
나의 이기적인 생각이었을까요?
헌금을 안 하려고 핑계 되는 마음이라 생각했습니다
마땅히 드려야 할 십일조를 내가 도둑질하여 어디 쓰려고? 양심이 비난했습니다

정말 나의 십일조는 연보궤에 두 렙돈을 넣은 여인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믿음은 본받지 못하고 정말 별 볼일 없는 적은 액수였습니다
그 작은 액수를 지금껏 모았는데 이상하게도 따로 분리해 둔 것이 아닌데도
늘 일정 금액이 남아서 통장에 쌓였습니다
그 돈이 바로 한국행 비행기 티켓 값이 되었습니다
먼저 한국행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돈이 모이니 한국 여정이 잡힌 것입니다
늘 그렇지만 나의 앞길을 주님이 아십니다
내가 계획하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생계를 위해 하고 있는 일도 있고 남편과 자녀들 그리고 돌봐야 할 강아지도 3마리나 됩니다
내 마음대로 어디를 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나는 현재 다윗처럼 내려 놓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시간입니다
내가 가진것이 없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내려 놓아야 되는것들이 많음을 알려주십니다
이번 여정에는 어떤 사람을 만나게 하실지 무슨 일을 만나게 될지
또 한 번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설레이고 있습니다
당분간 특별한 성령님의 가르침이 안 계시다면 잠시 묵상 글 올림을 쉬겠습니다
한국 여정 동안 많은 가르침으로 묵상 글의 양식이 많이 쌓이기를
기대해 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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