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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단편 묵상

은혜받은 자리에서 예수를 아는 자리로 더 나아가 증거하는데까지

by GOTOKINGDOM 2026. 1. 11.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요5:2-9)

 

 

오늘은 평생 교회 다니면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종교인들 즉 율법주의 자들을 일깨워 주시는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배우며

마음에 깊이 세겨봅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셔서 율법 아래 곧 죄 아래 갇힌 자들을

풀어주시고 죄에 속한 연약함들을 치유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 육적 치료에서 끝나지 않고 영적 치유에 이르기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동안 누워 있던 병자를 고치신 장면은

단순한 기적의 이야기가 아니라, 죄와 율법, 정체성과 삶의 자리,

그리고 마지막 때의 교회에 대한 깊은 영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병자를 소개할 때 그가 누워 있는 장소를 특별히 강조합니다.

또 예수님이 그가 오랜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고 기록합니다.

 

베데스다 못은 양문 곁, 즉 제물인 양들이 드나드는 문 근처에 있다고 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은 그 문을 지나 성전으로 들어가야 했고,

그 문은 속죄와 희생을 상징했습니다.

그 문은 예수님으로만 들어갈 수 있으며 흠 없으신 어린양이 되셔서 대속하신 것입니다 

출애굽 때에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른 가정에는 장자의 죽음이 넘어갔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시작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두 어린 양을 잡음으로 유월절을 지났습니다

그러나 모두 광야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출애굽 때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가 왜 장자만의 심판 이었을까?

이것이 맏아들로 오신 예수님의 대속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심판에서 옮겨진 이스라엘이 왜 죽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노하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지게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느니라.”(히3:17-19)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4:2)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10:5)

 

“주께서 백성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그 후에 믿지 아니한 자들을 멸하셨다는 것을 너희가 알고 있느니라.”(유1:5)

 

성경은 분명 예수님 즉 어린양의 대속으로 구원을 받았으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떨어져 나가는 자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원 취소, 구원하신 후 걸러내심 등으로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양 예수님의 구원은 완전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구원의 믿음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그 과정을 아주 잘 보여주는 모세 5경을 압축한 영적인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

ὁ τὸν λόγον μου ἀκούων
καὶ πιστεύων τῷ πέμψαντί με
ἔχει ζωὴν αἰώνιον
καὶ εἰς κρίσιν οὐκ ἔρχεται,
ἀλλὰ μεταβέβηκεν ἐκ τοῦ θανάτου εἰς τὴν ζωήν.

헬라어 원문으로 자연스러운 직역은 이렇습니다 

“내 말을 귀 기울여 계속 듣는 자 (현재분사-계속 진행)
그리고 나를 보내신 이를 계속 믿는 자(현재분사-계속 관계)
영원한 생명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현재시제-영생 안에 있는 상태)
심판(정죄)에 들어오지 아니하고, (현재시제-정죄받지 않는 상태)
오히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져 있다.(완료시제-결과가 그대로 유지된 상태)

 

이 말씀에서 살펴볼 것은 이미 완료된 상태가 어떻게 결과로 얻어지는지를 이해되어야 합니다

어린양의 대속으로 심판받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믿는 자들은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과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보내신 이와 보냄 받아 오신 이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들으며 그 관계가

계속 유지된 자에게 심판 즉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고 결과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관계 안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말씀하심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속하였던 출애굽 1세대들은 모두 믿지 않아 불순종함으로 그 결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베데스다 못 행각 다섯에 누워 있던 38년 된 병자와 모든 병자들은 모세 5경에 속하였던

광야 세대들 즉,율법 아래에서 정죄받으며 죽어버린 이스라엘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38년이라는 숫자가 이미 광야에서 죽은 출애굽 1세대를 상징하는 것이며

그들은 율법 아래 눌린 자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율법에 병은 죄로 인한 형벌)이요,

상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양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떠난 때부터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38년 동안이라,

이 기간에 여호와께서 맹세하신 대로 그 시대의 모든 군사들이

진영 가운데서 멸망하여 없어졌느니라.(신2:14)

이 38년은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죽음을 맞은 시간입니다.

1세대 전체가 광야에서 죽고 아론과 모세의 죽음의 결론으로 율법 아래에 있던

옛 시대가 완전히 끝나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5장에 등장한 38년 된 병자는 단순히 오랫동안 병을 앓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율법 아래 눌려 죽어버린 이스라엘 정체성이며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안식을 얻지 못한 시대를 그대로 몸으로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안식일에 일하시는 주님을 율법으로 정죄하는 종교인들 모습을 보여 주시며  

그에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는 내용인 것입니다 

병자가 누워 있던 베데스다의 자리는 율법 아래에서 스스로 일어날 수 없고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던 사람을 의지 하려는 무리들을 비추는 것입니다.

 

천사가 물을 움직이면 먼저 들어가는 자만 낫는다는 표현은 율법 아래의 구조가 가진
자격 경쟁과 행위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베데스다  בֵּית חֶסְדָּא (베이트 헤스다)못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 병자의 “누운 것을 보셨다” 헬라어 “κειμενον”(케이메논)

"눕다, 놓여 있다, 정해진 자리에 머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 28장에서 “두려움으로 떨며 엎드린 경비병들이 바닥에 쓰러진 상태”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는데,

이는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눅 2장에서는 구유에 “누여 있다”로 번역되는데, 단지 눕혀진 상태가 아니라

전체 환경과 상황에 의해 자리가 결정되고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38년 된 병자가 가진 상태가 바로 이런 자리라는 단어로 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 벗어날 능력도 없으며, 주변 환경에 의해

정해진채 고정되어 버린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그곳을 벗어날 길은 누군가 자기를 그 자비가 내려지는 곳에 넣어 줘야 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자가 병자라는 것에 주목하지 않으시고 그가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에 병자들이 모여있는 것을 알고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각자 다른 모습으로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누운 것과 병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연결하신 것을 보면 처음부터 이 병자는 

누워있지 않고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나음의 소망을 잃어 가며 누워 버린 것입니다.

"자비의 집" 뜻 그대로 자비를 기다렸지만 그 병자는 자비를 얻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문제였을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베데스다 못에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이 동한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병자는

무슨 병에서 이든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 사실을 다섯 행각에 있는 병자들만 알았을까요?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아니 근방 모든 지역 사람들이 다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 가벼운 감기부터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모든 자들이 나음을 입기원할 것입니다.

모두 각자가 가진 병의 고통이 가장 커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그곳은 자비의 집이지만 자비라고는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싸워서 이기는 자가 승리하듯이 먼저 나음을 입기 위해 경쟁을 해야 되는 곳이 되어

자비를 얻기보다 이기적이며 소외감만 얻게 되는 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런 양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한 목적이든 악한 목적이든 교회가 계급주의가 되었고 차별주의가 되었고

믿음의 수준을 서로 판단하는 당을 짓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많이 배운자와 많이 가진 자의 예배와 무식한 자와 가난한 자의 예배가 따로 있습니다

물론 대놓고 차별하지 않겠지만 그들  무리들끼리 당을 지어있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못에 모여있는 혈기 마른 자, 눈먼 자, 다리 져는 자들은 소외된 자들입니다

오늘날도 환영받지 못하는 무리들입니다

 

어떻게 혈기 마른 자가 혈기 온전한 자보다 먼저 못에 들어가겠습니까?

어떻게 눈먼 자가 멀쩡히 보는 자보다 먼저 들어갈까요?

어떻게 다리 저는 자가 건강한 다리를 가진 자보다 먼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처음부터 경쟁이 되지 않은 조건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종교의 열심히 자비를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을 깨달으라고 주시는 교훈입니다.

예수님이 진짜 자비를 나타내시려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자비가 나타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θέλεις ὑγιὴς γενέσθαι라고 물으십니다. 

θέλεις (텔레이스)‘원하다’, ‘갈망하다’, ‘의지하다’라는 뜻입니다.
단순한 감정적 ‘원함’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결단을 포함한 의지적 원함을 말합니다.

ὑγιὴς (휘기에스)‘건강한 상태’, ‘온전한’, ‘완전한’이라는 뜻입니다.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전체적인 온전함을 포함합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증상이 없어지는 치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서 다시 정상적이고 온전한 상태로 돌아가는 회복을 의미합니다.

γενέσθαι (게네스타가)‘되다’, ‘일어나게 되다’,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동사 γίνομαι(기노마이)의 부정과거 중간태입니다.

이 형태가 주는 뉘앙스는 수동적으로 ‘낫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너의 존재가 완전히 새로운 시작이 일어나기를 갈망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병자가 단순히 육체적 치유만이 아니라
삶 전체가 새롭게 시작되는 회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 병자의 문제는 이 대답에 있습니다.

율법 아래 종교인들은 언제나 사람을 의지합니다.

내가 병에서 나음을 입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나를 못에 넣어 주지 않아 그렇다는 것입니다.

늘 사람을 바라보고 종교 생활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율법적인 행함에 집착을 합니다.

강단에서 전해지는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목사님을 원망하고 성도들의 행함을 정죄하고 판단하며

자신이 피해자인 것 같이 스스로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일어나라”는 헬라어 “εγειρε”(에게이레)로  단순히 누운 상태에서 몸을 일으키는

동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일으키심, 무기력의 상태에서 새로운 존재로 들어 올리심이라는

부활의 어휘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신약 전체에서 부활과 새 생명과 깊이 연결된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자리”는 헬라어 “κραββατος”(크라브바토스)로 고정된 침상이나 간이침대뿐 아니라

가난, 병, 무기력, 정체성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걸어가라”는 헬라어 페리파테이(περιπάτει)로 걷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삶의 방식으로 행하며 살아가다는 뜻을 가집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라’, ‘사랑 가운데 행하라’, ‘빛 가운데 행하라’라고 할 때 모두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즉 예수님은 병자에게 움직임만을 회복시키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의 방향과 존재의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 2장에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네 사람의 손으로 메고 지붕을 뚫어 내릴 때

예수님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자리)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2:9)

 

 

그런데 예수님은 그 자리를 버려두고 떠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도록 그 자리 소속 자체를 옮기는 것입니다.

병자가 그 자리를 놓고 간다면, 그 자리는 또 다른 병자가 와서 눕게 될 것입니다.

베데스다에서 병자들이 눕게 되는 자리의 흔적조차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던 그 자리의 의미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과도 같은 구조를 가집니다.

과거의 자리는 나를 짓누르던 자리였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로 인해

내가 기쁘게 지고 걸어가는 순종의 표징이 됩니다.

그 자리는 이제 내 발걸음을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주만 따라갈 때 그 발걸음 하나하나 순종의 흔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우리의 믿음은 멈추어 지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병 나음을 입은 자가 아직도 자신을 낫게 하고 자리를 들고 가라 명하신 이가

누구신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5:13-14)

 

예수님은 병자를 성전에서 다시 만나셔서 말하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때의 죄는 단순한 도덕적 죄가 아니라 율법의 정죄를 받는 자리로 다시 

눕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생명의 자리로 이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문을 통과하여 성전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던 병자였습니다.

병과 부정함 때문에 율법은 그를 성전 밖에 머물고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자비로 그는 양문을 지나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다닐지라도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증거 하는 자리에 이르도록 또 성전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베데스다 병자의 이야기는 단순한 치유의 사건을 넘어 마지막 때의 교회와 성도들의

자리 이동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더 이상 성도들이 건물이나 인간이 만든 종교적 교리 속에 눕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이며,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떠나라고 하시며 무기력과 속박, 얽매임의 자리에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배교의 체계 속에서 나오라 하신 계시록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지금도 성도들에게

옛 자리에 눕지 말고 새로운 순종의 걸음을 걸으라고 명하시고 계십니다.

 

38년 병자가 병에서 나음을 입었으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한 채

또 그의 삶은 사람의 종으로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자비를 베푸시기를 쉬지 않으시고 일하셨다고 하십니다

그 나음을 입은 자는 비로써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증거 합니다

"나를 고친 이는 예수라"

그러나 종교인들은 안식일을 범한다며 예수님을 율법으로 정죄하며 핍박을 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끝이 나고 제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직도 일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기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내게 새겨지는 가장 깊은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그 자리를 들고 가라는 말씀은 단순히 과거를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과거를 넘어서 새로운 정체성으로 살아가라는 명령이며 나에게 또 다른 영적 삶의 현장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 가슴 벅차게 합니다.

다시 그 자리에 돌아가면 그 자리는 과거처럼 나를 지배하려 하겠지만,

그 자리를 들고 걸으면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속하지 않고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 응답을 기다리며 전전긍긍했던 시간들이 묵상을 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음을....

제가 믿음이 없었습니다 

갈바를 알지 못하여 길이 보일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멈추었다 생각했는데 

어쩜 저도 자리에 누워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저는 힘차게 첫 발을 내어 딛었습니다

LED 전등불처럼 나의 앞길이 환하게  켜졌습니다

이렇게 순종하고 나니 모든 것이 다 형통한데 그 순종이 뭐라고 이렇게 힘이 드는 것일까요

 

마지막 때의 교회는 정착이 아니라 순종으로 사는 교회이며, 위치가 아니라 정체성으로 존재하는

각 개인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며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한 곳에 눕지 않고 주님이 가시는 어디든지 따라가는 정절이 있는 사람,

과거에 메이지 않지만 비천했던 과거의 자신을 잊지 않고 겸손한 자,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 찾으시는 마지막 시대의 성도라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오늘도 저와 우리 가정을 이끄시고 가장 귀한 것으로 채워주시며

사랑의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말씀으로 우리의 앞길을 비추어 주시니

감사 또 감사 영광 올려드리며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GpEcbVBBeQ&list=RDSGpEcbVBBeQ&start_radi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