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배웁니다
언제나 다정하시고 친절하신 주님은 나의 눈높이에 맞추어 대화하시고
나를 무안하게도 죄책감에 잡히게도 하지 않으싶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에는 날 선 검같이 나를 예리하게 수술하십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5:1-11)
성경은 삼위 하나님을 한 분으로 선포하지만,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구별하여 말씀하신다.
단순히 언어적 다양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삼위로 역사하시는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래서 성경은 때로는 “아버지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표현들은 서로 분리된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세 가지 깊이를 차례로 보여준다.
“아버지 안에서”라는 말은 구원의 근원이 아버지의 뜻과 계획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부르심, 선택, 보호, 인도하심은 모두 아버지의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창세 전에 계획하신 구속의 의도도 아버지께 있으며, 그 계획 가운데 우리를 품고 이끄신다.
그래서 성경은 자주 하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구원의 샘이 그분 안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구원의 계획이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에서 시작되고 끝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계획이 우리에게 실제가 된 자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성부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드러났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만 우리에게 효력을 갖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속, 우리의 중보자, 우리의 문, 우리의 길, 우리의 머리이시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 오늘 우리의 안에서 실제가 되는 자리,
바로 그것을 표현할 때 성경은 “성령 안에서”라는 말을 사용한다.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 하시며,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의 심령에 적용하시는 분이시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말씀을 열어 알게 되고, 기도하게 하심을 경험하고,
연약할 때 도우심과 중보 하심을 경험한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구원이 성령 안에서 주관적이고 생생한 삶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이 세 표현은 우리를 세 방향으로 나누어 놓기 위함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구원의 깊이와 풍성함을 세 겹으로 보여주는 은혜의 언어 표현이다.
아버지의 계획 안에서, 그리스도 안의 연합 안에서, 성령 안의 적용과 교통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실제로 살아가게 된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있을 것이라 말한다
이 흐름 안에서 로마서 5장의 말씀은 더욱 선명해진다.
롬5:1-2에 이미 모든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완성 안에 걸어가는 우리의 삶에는 환난이 있고
인내해야 할 시간과 연단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 삶의 여정에서 우리가 낙망하여 포기하지 않도록 성령께서 일으키심이 소망이다
바울은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자리는 성령 안에서 경험하는 은혜이고,
부어진 사랑의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이며,
그 모든 구원의 근원은 아버지의 사랑이다.
다시 말해 이 한 구절만 보아도 아버지·아들·성령 삼위의 사랑이 동시에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 우리에게 부어졌는지 세 번에 걸쳐 설명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증언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상태가 준비되기 전에 이미 실행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은 우리가 회개하기도 전에 이미 완성되었으며,
성령은 우리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일 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심령에 부어주셨다.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변화 속도가 아니라,
먼저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인 것이다.
결국 “아버지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라는 성경의 표현은
삼위 하나님의 구별된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열심인
사랑의 흐름을 드러내신 것이다.
아버지 안에서 시작된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성령 안에서 우리의 삶 속에 부어지고 확증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흔들리지 않으며, 부끄럽지 않다.
왜냐하면 그 소망의 근거는 우리의 상태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우리 안에 부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막연한 심리적 낙관을 소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언제나 객관적인 하나님 안에서 언약 관계,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신분의 실제,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보증하시는 영광의 실체를 가리킨다.
우리가 가지는 가장 대표적인 소망의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벧전 1:3은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한다.
여기서 ‘산 소망’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된 실제적이고 능력 있는 소망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부활이 이미 보증되었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말 번역만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거듭남 자체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원문은 조금 다르게 말하고 있다.
ἀναγεννήσας ἡμᾶς εἰς ἐλπίδα ζῶσαν δι’ ἀναστά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아나게네사스 헤마스 에이스 엘피다 조사 디 아나스타세오스 이에수 크리스투
직역하면
그분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무엇으로 들어가게 하셨는가 하면 산 소망 안으로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거듭나게 하심이 목적이고, 산 소망은 영원한 기업을 향한 시작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진 통로이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고,
그 거듭남의 상태가 산 소망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시작 상태를 말한다.
산 소망은 거듭남의 원인이 아니라 우리의 기업을 얻는 여정에 있는 성령의 열매이다.
거듭난 자에게 주어진 존재 방향이 산 소망이며 이끄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요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에서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여기서 거듭난다는 말은 ἄνωθεν γεννηθῇ 아노θεν 겐네데 위로부터 태어나다는 뜻이다.
인간의 결단이나 이해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오는 생명의 원천을 말한다.
디 3: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 여기서 중생이라는 말이 바로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옛 신분을 씻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실제가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부활은 성령의 생명 역사가 흘러나오는 근거이다.
죽음을 이기신 생명이 실제로 열렸기 때문에, 그 생명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거듭남을 말하면서 반드시 부활을 연결하는 것이다.
부활은 단지 미래 소망의 증거가 아니라, 지금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근원이다.
그 부활 생명에 참여한 자가 거듭난 자이며, 그 상태를 산 소망이라 부른다.
거듭남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그 성령의 생명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온다.
그 결과로 거듭난 자의 존재 전체가 산 소망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거듭난 자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환난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소망을
현재형 생명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존해 주시는 것이다.
갈 5: 5 에는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 말한다.
의의 소망은 단지 칭의가 선언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가 완전히 드러날 마지막 날을 말한다.
성령은 이 의의 완성을 사모하도록 우리 안에서 증언하신다.
이미 거듭난 자가 어떤 자세로 현재를 사는가를 말하는데 소망은 기다림이라는 동사와 연결된다.
중요한 것은 이 기다림이 성령 안에서 믿음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소망은 막연한 미래 기대가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자가 의의 완전한 드러남을 향해
살아가는 현재진행의 깨어있음 상태이다.
베드로전서가 소망의 출발을 말한다면, 갈라디아서는 소망 안에서의 삶의 자세를 말한다.
그다음으로는 골 1: 27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니라”라고 말한다.
소망은 단순히 고통 없는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의 기업의 보증이요, 그 영광 안으로 이끄시는 실체이다.
소망의 실체가 한층 더 깊이 드러난다.
소망은 무엇을 기다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우리 안에 계시는가의 문제로 깊어진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 그 자체가 영광의 소망이라는 선언은
세상 그 어떤 종교에서 볼 수 없는 소망을 외적 약속에서 내적 실제로 끌어들인다.
이 단계에서는 소망이 더 이상 바깥을 향하여 가지 않는다.
이미 안에 계신 그리스도 때문에 소망은 흔들리지 않는 현재의 삶이 된다.
바울의 서신 중에서도 비교적 후기에 속하는 골로새서에서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은
더 깊은 관계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딛 1: 2은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을 말하고 있다
영생은 단순히 죽지 않는 영원한 삶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결과물이 된다
죽지 않음이 목적이 아닌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이전의 새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새 창조와 몸의 속량을 기다리는 소망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서 조금 나아지는 보상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완전한 나라를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서는 소망이 시간 자체를 초월한다.
영원한 생명의 소망은 장차 받을 무엇이라기보다, 하나님이 영원한 때 이전에 약속하신
생명 위에 이미 세워진 기초이다.
소망의 근거가 우리의 체험이나 내주 인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며,
그 모든 것이 영원 전 하나님의 약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확증이다.
그래서 굳이 흐름을 잡아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
부활로 열어진 생명, 거듭남으로 시작된 산 소망
갈라디아서 5장 5절
성령 안에서 그 소망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현재의 삶
골로새서 1장 27절
그 소망의 실체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으로 확증
디도서 1장 2절
그 소망의 최종 근거는 영원 전 하나님의 약속이었음을 선포한다
이 순서는 위계적 단계가 아니라 같은 소망을 점점 더 깊은 차원에서 밝히는
계시의 농축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성경적일 것이다.
바울의 기록 연대가 뒤로 갈수록 소망은 더 명확해지고, 더 흔들리지 않으며,
더 존재의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결국 소망은 어떤 시점에 도달해야 얻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시작되어 성령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의 내주로 확증되며, 영원 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봉인된 한 생명을 이룬다.
이런 성경적 소망을 바울은 “부끄럽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소망의 근거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상태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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